“북한 비핵화가 성공한다면 그 핵 폐기 모델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방식이 될 터여서 우리는 ‘북한식 핵 폐기’란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미국의 핵 전문가들은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드러낸 뒤 이런 말을 해 왔다. 미국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을 위해 검토한 과거 핵 폐기 모델은 4가지다. ‘리비아 방식’ ‘남아프리카공화국 방식’ ‘카자흐스탄 방식’ ‘우크라이나 방식’. 그 중 어느 것도 북한에 그대로 적용하기가 적절치 않아 새로운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분석이었다.
미국 백악관이 16일(현지시간) 언급한 ‘트럼프 모델’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북한식’ 핵 폐기를 표현만 달리 한 것이다. 리비아식도, 남아공식도 아닌 새로운 모델이란 의미에서 미국 정부는 ‘트럼프식’이란 용어를 들고 나왔다.
세라 허커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기자들과 만나 "리비아 모델이 우리가 사용하는 북한 핵 폐기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북핵 협상은 정해진 ‘틀(cookie cutter)'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따르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는 최고의 협상가이며 우리는 이를 100% 확신한다"고도 했다.
이는 북한이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담화를 통해 "미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핵 포기를 강요한다면 북미정상회담을 재고하겠다"면서 존 볼턴 백악관 보좌관과 그가 주장하는 리비아 모델을 강도 높게 비판한 뒤 나온 말이었다.
김 부상은 담화에서 "세계는 우리나라(북한)가 처참한 말로를 걸은 리비아나 이라크가 아니라는 데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다"며 "핵개발의 초기 단계에 있었던 리비아를 핵보유국인 우리 국가와 대비하는 것 자체가 아둔하기 짝이 없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리비아 모델’을 거부하자 미국이 꺼내든 ‘트럼프 모델’은 과연 어떤 방식일까. 이를 추론하려면 과거의 4가지 모델을 분석해봐야 한다. 리비아, 남아공,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동기와 폐기한 경위가 조금씩 달랐다.
볼턴 보좌관이 선호하는 리비아 방식은 ‘선(先) 폐기-후(後) 보상’이었다. 리비아는 1990년대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가 미국과 영국의 설득 끝에 핵 폐기를 결정하고, 핵무기와 원심분리기 등을 모두 미국에 넘겼다. 2003년 12월 핵 포기 선언 후 핵 프로그램 폐기까지 22개월이 걸렸다.
남아공의 핵무기 개발 동기는 과거 인종분리 정책(아파르트헤이트)과 관련돼 있다.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하는 국제사회가 남아공을 상대로 제재를 가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남아공 정부는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 서방을 상대로 한 벼랑 끝 전술이었다. 남아공은 82년 핵폭탄 제조에 성공한 뒤 89년 항공기로 투발할 수 있는 6개의 핵폭탄을 만들었다. 그러나 남아공은 89년 12월 드 클라크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인종분리 정책을 철폐하고 핵무기도 폐기하기로 선언했다.
카자흐스탄과 우크라이나는 소련 붕괴 후 떠안은 핵무기를 이관하거나 해체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체 비용을 미국이 댔다는 것도 같다. 카자흐스탄은 경제 지원 및 체제 보장을 대가로 92∼95년 핵무기 1000여기와 전략폭격기를 러시아에 넘겼다. 카자흐스탄 방식은 북한의 핵무기를 해외로 반출하기 위해 거론되고 있다.
소련 붕괴로 세계 3위의 핵보유국이 된 우크라이나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겪은 뒤 94년 1월 경제적 지원과 체제안전 보장을 요구하면서 미국, 러시아와 핵무기 폐기를 약속하는 리스본 의정서를 체결했다. 우크라이나 방식은 이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무력 합병하면서 체제안전 보장 약속을 깼다는 맹점이 있다.
북한의 핵무기는 적국인 미국을 직접 겨냥하고 자체 개발했다는 점에서 이 네 나라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특히 미국의 공격에 대비해 곳곳에 핵 시설과 장비가 은밀하게 숨겨져 있고, 상당수는 실전 배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소식통은 “북한 핵무기가 20∼60개로 추정되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갖추고 있어서 폐기 대상과 절차에 기존 핵 폐기 방식을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은닉된 핵무기와 대륙을 넘나드는 운반수단을 찾아내 동시에 폐기하고, 미국을 위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보상책까지 맞물려야 한다.
따라서 곧 구체적 윤곽이 드러날 트럼프 모델은 기존의 4가지 모델에 비해 훨씬 ‘빠르게’ 더 ‘통 크게’ 매우 ‘광범위하게’ 비핵화 과정이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