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인 15일 서울 동대문구 정화여자상업고교에선 ‘프리허그’ 행사가 열렸다. 선생님들이 교문 앞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빵을 나눠주며 한 명 한 명 꼭 안아줬다. 어색함은 잠시였고, 선생님 품에 안긴 학생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해묵은 촌지 논란에 김영란법까지 시행되면서 스승의 날을 기념하는 모습도 달라졌다. 이 학교 선생님들은 스승의 날을 학생들에게 ‘베푸는’ 날로 삼았다. 학생들로부터 무언가 감사의 표시를 받는 대신 제자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전국의 많은 학교에서 이 같은 감사와 사랑의 포옹이 이어졌지만, 한쪽에선 ‘불편한’ 스승의 날이 연출됐다. 지난 몇 달간 벌어진 ‘미투 운동’은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쿨미투’란 말이 나올 만큼 교내 성폭력에 대한 폭로와 규탄이 벌어졌고, 이는 스승의 날에도 영향을 미쳤다.
미투 캠페인 이후 첫 스승의 날을 맞아 서울대 연세대 동덕여대 등의 성폭력 교수 비상대책위원회 학생들은 오전 11시 광화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다. 성폭력 가해 교수들의 파면을 촉구하는 자리다.
이들은 회견에 앞서 배포한 자료를 통해 “교육부는 책임 있게 성폭력 가해 교수 파면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대학에서 벌어진 미투 운동은 가해 교수의 성폭력을 폭로했고 해당 교수를 징계하라는 요구로 이어졌다”며 “그럼에도 대학 당국은 가해 교수 징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어 “서울대에서는 폭행 폭언 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교수가 정직 3개월에 그치는 징계를 받았고, 동덕여대에서는 성폭력 가해 교수의 혐의가 분명함에도 이를 고발한 학생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성균관대 연세대 이화여대 등 다른 대학에서도 가해 교수 징계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회견 말미에 가해 교수 이름이 적힌 카네이션 패널을 찢는 퍼포먼스도 준비했다.
경기도의 H고교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 스승의 날을 보내고 있다. 이 학교의 한 교사는 최근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다른 교사 10여명도 수업 중 학생들에게 부적절한 언행과 신체 접촉을 한 의혹이 제기돼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졸업생 96명이 재학 시절 남자교사 4명에게 수시로 성희롱·성추행을 당했다는 폭로가 나온 서울 Y고도 비슷한 상황이다.
일선 교사들은 “우리라고 스승의 날이 마냥 좋은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차라리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는 교사의 글이 여러 건 올라왔다. 자신을 17년차 교사라고 소개한 청원자는 ‘스승이 없는 스승의 날은 차라리 폐지 또는 휴일 지정을 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청원글에서 “학교 선생님은 1년에 단 하루,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내미는 꽃 한 송이와 편지 한 통을 받아도 죄가 되는 세상이라니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차라리 스승의 날을 폐지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지난달 20일부터 진행 중인 "스승의 날을 폐지하여 주십시오"라는 청원에는 1만명 이상이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외에도 "스승의 날 폐지 청원" "스승의 날 폐지" "스승의 날을 폐지해주세요…" 등 비슷한 청원 글이 다수 게시됐다.
청원 내용은 대부분 교권이 추락해 스승의 날의 존재 의미가 없어졌다는 주장이었다. 한 청원자는 "모든 책임을 학교에 떠넘기며 교사를 스승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어 참고 견디라고 하면서 교사는 있지만 스승이 없다는 말은 또 아무렇지 않게 합니다. 왜 이 조롱을 교사들이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지난 9일 '2017년 교권회복 및 교직상담 활동실적 보고서'에서 지난해 접수된 교권 침해 사례가 508건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교총은 "교권 침해 사건은 2010년대 초반까지 200건대로 접수되다가 2012년 처음으로 300건대를 넘겼다. 이후 2014년 439건으로 400건대, 2016년에는 572건으로 처음으로 500건대를 넘었다"라고 분석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