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이 북한에 ‘과감한’ 경제적 지원을 시사하는 승부수를 띄웠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11일(현지시간) “북한이 신속한 비핵화를 과감하게 실천하면, 한국과 동등한 수준의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밝혔다. 비핵화의 대가로 제재 해제는 물론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체계에 북한을 받아들이고, 국제기구를 통한 자금 지원 등으로 대규모 경제 지원을 시사한 것이다.
◆ 南 45분의 1 국민소득 北에… 폼페이오 “한국처럼 잘살게 될 것”
폼페이오 장관은 이날 워싱턴DC 미 국무부 청사에서 강경화 외교부장관과 한미 외교장관 회담을 가진 뒤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 취할 과감한 조치를 강 장관과 의논했다”며 “김 위원장이 올바른 길을 선택한다면 북한과 북한 주민들을 위해 평화와 번영이 넘쳐흐르는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에 ‘신속한 비핵화’를 촉구하고 그 대가로 한국 수준의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한국은행이 추정한 국민총소득(GNI) 기준으로 북한의 경제 규모는 2016년 기준으로 남한의 45분의 1수준이다. 단기적으로 북한의 경제를 남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기적으로 북한을 남한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북미 수교는 물론이고 국제금융기금(IMF)이나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의 자금지원이 불가피하다.
폼페이오 장관은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났을 때 과거 미국의 적이었으나 지금은 가까운 협력국이 된 나라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며 “우리의 희망은 북한에 대해서도 같은 목표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워싱턴의 외교소식통은 “폼페이오 장관의 발언은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하기로 한 판문점 선언을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자신이 두 차례 평양을 방문해 김 위원장과 나눈 대화를 토대로 북미정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을 빼고 서방에서는 내가 가장 많은 시간 동안 김 위원장과 대화를 나눈 사람”이라며 “나는 김 위원장과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생산적인 대화를 했다”고 강조했다.
폼페이오 장관의 설명대로라면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문제는 검증이다. 미국 내에서는 북한이 핵무기를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다고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의구심을 제거하려면 북한이 약속한 비핵화를 제대로 이행했는지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은 과거 4차례 비핵화 합의를 하고도 실효적인 검증수단을 확보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막지 못했다.
검증 주체도 이원화될 가능성이 크다.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북한에 대한 사찰은 그 이전과 전혀 달라진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무기 원료로 사용될 수 있는 핵물질 생산 등에 대해서는 사찰할 수 있지만 핵무기 자체에 대해서는 단속 권한이 없다. 북한이 핵탄두 해체나 인도 등에 동의한다면 이를 검증하거나 인도받는 주체는 IAEA가 아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어야 한다. 북한의 핵시설을 사찰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북한의 신고를 토대로 할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미신고시설에 대해서는 사찰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
폼페이오 장관도 “북한의 핵위협을 제거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강력한 검증이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전 세계 동반자 국가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 기자 “김정은, 합리적인가?”… 폼페이오 “무례한 질문”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미국 기자에게 “무례한 질문”이라며 발끈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11일(현지시간) 워싱턴 미 국무부 청사에서 강경화 외교장관과 가진 공동기자회견에서 폭스뉴스 기자가 “김 위원장을 만나본 소감이 무엇이냐. 그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이렇게 반응했다.
그는 “김 위원장이 합리적이냐라는 질문은 무례하다”며 “그렇다. 우리는 즐겁고 실질적인 대화를 나눴다”고 답했다. 이어 “우리의 대화는 깊고 복잡한 문제들, 김 위원장이 내려야 할 전략적 선택,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진행돼야 하는지에 대한 김 위원장의 생각 등을 망라했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을 만나 느낀 인상에 대해서는 “배포한 비디오를 보라”며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눴으며, 상호 목표에 대한 이해를 공유했다”고 말했다. 북한이 지난 9일 공개한 비디오와 사진에는 김 위원장과 폼페이오 장관이 파안대소를 하는 장면도 있었다.
폼페이오 장관의 이런 태도는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시절 대북 강경파로 불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두 차례 만남을 통해 폼페이오 장관이 김 위원장과 개인적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북·미 정상회담에 나서는 상대방을 예우하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싱가포르 정상회담이 확정된 이후 미국의 대북 협상 채널의 주도권이 CIA에서 국무부로 넘어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워싱턴의 한 외교소식통은 “폼페이오 장관이 2차 방북할 때까지만 해도 CIA 요원들을 데리고 갔지만 싱가포르 회담 확정 뒤에는 국무부 라인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에 따라 북한의 카운트파트도 정찰총국에서 외무성으로 바뀌고 있다는 관측이다. 최근 북한도 이수용 노동당 부위원장과 이용호 외무상을 김 위원장의 회담에 배석시키는 등 외교 수뇌부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북·미가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접촉을 계속하기로 함에 따라 미 국무부와 북한 외무성 간 채널이 본격 가동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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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전석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