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의 첫 전국선거인 6·13 지방선거가 13일 ‘D-31'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한 달 뒤면 지방권력의 향배가 판가름 난다. 한반도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북미정상회담은 이보다 한 발 앞선 ‘D-30'을 세고 있다. 역시 한 달 뒤면 ‘북핵’이란 용어가 한반도에서 사라질 수 있을지 결정될 것이다.
한국은 사상 최대의 외교안보 이벤트와 올해 최대의 정치 이벤트를 하루 차이로 잇따라 치른다. 두 ‘사건’은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한국 선거판은 늘 ‘북풍(北風)’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의도적인 ‘북풍 공작’이 있었을 정도로 유권자는 안보에 민감하다. 북미정상회담은 역대 북풍과 차원이 다른 초대형 바람을 안고 있다. 그 바람이 지방선거판에 미칠 영향 역시 대단히 클 수밖에 없다.
◆ ‘대륙풍’이던 북풍… 이번엔 ‘해양풍’
북풍은 통상 도발이든 화해 제스처든 북한 정권의 독자적 움직임을 통해 남쪽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식이었다.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정은 정권이 잉태한 바람은 ‘파트너’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대화 제의에 화답해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성사됐고 선거 전날로 확정된 회담 장소는 동남아의 싱가포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약 1만5500㎞, 김정은 위원장은 약 4700㎞를 비행기로 날아가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한다. 싱가포르 현지에선 G20 정상회의 등 초대형 국제컨벤션을 앞둔 때보다 더 흥분된 모습이 감지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어떤 국제행사보다 큰 관심을 끌 북미회담을 앞두고 북한은 또 다른 이벤트를 마련했다. 이달 23~25일 해외 언론을 초청해 풍계리 핵실험장 폐쇄 장면을 공개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핵실험장 폐쇄 일정’ 발표에 "대단히 똑똑하고 관대한 제스처“라며 즉각 환영의 뜻을 표했다. 북한 외무성은 이 발표와 함께 "앞으로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지키기 위해 이웃 국가들과 국제사회 전체와 계속해서 긴밀한 접촉과 대화를 추진해 나가겠다"고 천명했다. 공식 정부기구를 통해 지금껏 국제사회가 들어본 적 없는 최고 수준의 평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외교가에는 “실패한 정상회담은 없다”는 말이 있다. 정상회담은 양측 모두 어떤 형태로든 성과물을 만들고 그것을 포장해 공개하는 자리여서 대부분 ‘좋은 말’이 오가게 돼 있다는 뜻이다. 정상회담을 하기로 결정됐다는 것 자체가 ‘성과’가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고 외교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더욱이 북한과 미국 모두 회담을 앞두고 우호적 발언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회담 성공을 향한 양측 의지가 매우 강해 북미정상회담이 몰고 올 ‘북풍’은 온화한 ‘해양풍’ 성격일 가능성이 크다.
◆ 어느 때보다 힘겨워진 지방선거 ‘어젠다 설정’
선거를 치르는 정당과 후보 입장에선 이슈를 부각시키고 어젠다를 설정하기가 어느 때보다 어려워졌다. 앞으로 한 달간 여론의 시선은 북미회담에 맞춰질 게 분명하다. 이 같은 사상 초유의 이벤트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관심을 끈다. 지방선거에 뛰어든 이들은 그 틈을 비집고 인물과 공약을 알리며 유권자의 시선을 붙잡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 북풍은 여권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남북정상회담을 ‘위장평화쇼’라고 평가절하해 온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6·13 지방선거 필승전진대회에서 ‘평화가 곧 경제'임을 강조하고 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지난 9일 경남도당 필승대회에서 "역사적인 대전환기에 운전자를 넘어 한반도 평화를 심어낼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에 큰 격려를 보내 달라"고 했다.
문 대통령 지지율은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80% 안팎을 기록했다. 민주당 지지율도 50%대를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북미정상회담 성과가 가세할 경우 여권을 향한 긍정적 여론은 한층 높아질 수 있다. 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북미정상회담에 강한 기대를 드러내면서 ‘드루킹 특검'으로 여권 공세를 막아보려던 전략도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태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대구에서 열린 지방선거 필승결의대회에서 "문재인정부가 얼마나 사정을 했으면 지방선거 하루 전에 싱가포르에서 회담을 하느냐"며 "결국은 남북평화쇼로 지방선거를 덮어버리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국당은 ‘민생’에 초점을 맞췄다. 기존 지방선거 슬로건 '나라를 통째로 넘기시겠습니까'에 '경제를 통째로 포기하시겠습니까'를 추가해 안보에서 경제로 급선회했다.
이번 지방선거는 다음 총선까지 정치지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결과에 따라 각 정당 지도부의 거취 등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 북미정상회담의 파급력이 압도하는 선거가 될지, 드루킹과 민생을 앞세운 야권의 공세가 힘을 받을지 주목된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