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 논란이 지난달 12일 언론에 보도된 지 한 달이 지났다. 한진그룹 오너일가가 일상화된 갑질을 저질렀다는 직원들의 폭로가 이어졌고, 탈세·밀수 등의 혐의에 대한 관계당국의 전방위 수사가 진행중이다. 하지만 한진 일가는 사태가 악화될 때마다 진정성 없는 사과문을 내놓거나 ‘일단 소나기는 피하고 보자’는 식의 꼼수로 국민적 분노를 키우고 있다.
◇조현민의 ‘로봇 사과’…“심려를 끼쳐드려”
한진그룹 일가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물벼락 갑질’ 당사자인 조 전 전무가 지난 1일 경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했을 때 단적으로 드러났다. 포토라인에 선 조 전 전무는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대한항공 직원들이 준비하고 있는 촛불집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제보자에게 보복이 있을 것인지 질문이 이어졌지만 “죄송하다”는 말만 6번이나 반복했다.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한 무성의한 사과에 “로봇 같다” “앵무새냐”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조 전 전무는 경찰 조사가 끝난 뒤 폭행과 업무방해 혐의를 인정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밀수나 탈세 의혹에 대해 묻자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듯 잠시 고민하더니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을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하는 등 반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이명희의 ‘한 줄 사과’…18개 의혹 모두 부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은 그랜드하얏트인천 증축공사장에서 고성을 지르고, 직원을 밀치는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자택 수리 시 직원들을 폭행했다는 의혹, 자신을 ‘할머니’라고 부른 직원을 해고했다는 의혹 등 관련 의혹만 18가지가 터져나왔다. 경찰은 이 이사장을 폭행 및 업무방해 혐의로 입건하고 출국금지 조치했다.
침묵하던 한진그룹은 파장이 커지자 9일 이 이사장 의혹과 관련해 장문의 해명 자료를 냈다. 자료는 경찰이 수사 중인 호텔 옥상 폭행사건에 대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뉘우치며, 피해자를 비롯한 모든 분들께 사죄를 드립니다”로 시작된다. 그러나 곧바로 “일부는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보도되고 있다”며 A4 다섯 장 분량으로 18개 항목에 걸쳐 해명을 쏟아냈다.
호텔에서 이 이사장을 ‘할머니’라고 부른 직원을 해고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해당 상황이 있었지만 “웃으면서 방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다. 자택 수리 시 폭행했다는 보도와 관련해선 “무릎을 꿇리거나 때린 사실은 없으며 오히려 공사 인부들을 위해 사비로 호텔 출장 뷔페를 대접하고, 간식과 음식을 수시로 챙겼다”고 해명했다. 회사 경영 및 인사 간섭, 항공기 내 갑질, 명품 밀수 의혹도 모두 부인했다.
◇조양호, 진에어 대표이사 ‘꼼수’ 사퇴
조 회장이 10일 한진그룹 계열 저비용항공사인 진에어 대표이사직에서 갑자기 사퇴한 것도 여러 뒷말을 낳고 있다. 진에어는 전문경영인에 의한 책임경영 강화 차원이라고 설명했지만, 갑질 논란이 확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꼼수’ 사퇴라는 비판이 거세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진에어 항공면허 취소 여부 검토에 착수하자 조 회장이 서둘러 불끄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진에어는 미국 국적의 조 전 전무가 과거 6년간 등기이사로 활동해 항공사업법을 위반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국토부는 법무법인 3곳에 면허 취소에 대한 법리 검토를 의뢰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조 회장은 진에어 대표이사직에서만 물러났을 뿐 사내이사로서의 권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또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과 대한항공, 한진관광, 정석기업 등 7개사에서 대표이사 등 임원을 맡고 있어 그룹을 장악하는데 문제가 없다. 대표이사직 사퇴가 진정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검·경·관계당국의 전방위 수사…오너일가의 운명은?
현재 한진그룹 오너일가 수사와 관련된 기관은 검찰과 경찰, 국토교통부, 공정거래위원회, 고용노동부, 관세청, 국세청 등 7곳이나 된다. 수십년간 지속된 이들의 갑질과 탈세, 밀수 의혹 등에 대한 전방위 수사가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 이사장의 ‘공사장 폭행’을 수사중인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조만간 이 이사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할 방침이다. 조 전 전무의 ‘물벼락 갑질’을 수사한 서울 강서경찰서는 11일 사건을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검찰은 조 회장이 500억원대 상속세를 탈루했다는 혐의를 포착해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국세청은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가 2002년 남긴 해외자산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조 회장 등이 상속세를 신고하지 않은 정황을 포착해 검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조 회장 소환도 검토중이다.
오너일가가 세관을 거치지 않은 채 해외물품을 지속적으로 밀수해왔다는 의혹도 주목받고 있다. 관세청은 평창동 자택과 대한항공 본사 등을 압수수색했고, 자택에서는 이 이사장의 드레스룸 등 이른바 ‘비밀의 방’에서 관련 장부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부는 외국인인 조 전 전무의 등기이사 활동 관련 진에어의 면허 취소 여부를 검토중이며, 공정위는 대한항공이 기내 면세품을 판매하면서 오너일가가 납품업체로부터 부당이득을 취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고 있다. 노동부는 이들 일가의 갑질 관련 노동관계법 위반 여부를 들여다보고 있다.
오너일가의 갑질과 비리를 꾸준히 폭로해온 대한항공 직원들은 외부 집회를 확대하고 있다.지난 4일 서울 광화문에서 조 회장 일가의 퇴진을 촉구하는 1차 집회를 개최한 데 이어 12일에는 서울역에서 2차 촛불집회를 열 계획이다. 이번 집회에는 지난 집회 참석자의 배가 넘는 1000명 이상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