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의 대부’ 고(故) 피에르 르시앙이 타계하기 일주일 전 이창동 감독과 그의 영화 ‘버닝’에 대해 남긴 추천사가 전해졌다.
프랑스 영화 프로듀서이자 칸영화제 자문위원이었던 피에르 르시앙이 생전 미국 영화 전문지 인디와이어에 남긴 ‘버닝’ 소개 자료를 이 영화의 배급사 CGV아트하우스 측이 10일 공개했다. 아래는 그가 작성한 글 전문이다.
‘버닝’의 운명
세월이 얼마나 빠른가. 쿠알라룸푸르에서 우연히 우-웨이 빈 하지 사리(U-Wei bin Haji Saari) 감독의 영화 ‘방화범’을 본 지도 벌써 20년도 더 지났다.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태우기’를 말레이시아 문화에 뿌리를 내리게 각색해 영화화한 그 작품은 매 순간이 예측불가능성의 연속이었다. 그 영화는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선정되며 큰 성공을 거뒀고 그 이후 텔루라이드 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그리고 여타 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앞으로 걸어 나오는 아이를 오랫동안 잡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심금을 울린다. 영화를 보는 우리 관객들이 순수함을 재발견하게 되는 장면이다. 우리들 안의 순수함 그 자체를. 두어 해 전에 이창동 감독은 내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단편도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 태우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당시 나는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장면, 인물의 뒤를 카메라가 이리저리 따라가는 긴 쇼트, 그리고 첫 음향들로부터 우리는 우리 주변의 가깝고도 먼, 시끌벅적하고 와글거리는 삶의 현장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영화는 매 순간 예측할 수 없었던 것들로 이어진다.
1952년에 발표된 ‘강의 굽이’(한국제목: 분노의 강)라는 아름다운 제목의 영화는 단순한 서부영화 이상의 조예 깊은 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버닝’이 꼭 그와 같은 영화이다. 영화가 원작자가 꾸며낸 것들로부터 멀어져서 영화 자체로서의 맥박으로 그만의 고유한 생명력을 얻는 순간, 그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을까?
이창동은 아주 드문 휴머니스트 영화감독이다. 작품이 결코 ‘메시지’로 무거워지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또한 나는 영화 ‘버닝’이, 나 스스로가 놀랍게도, 한국인이 조상의 문화를 복원하면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을 예견하게 되리라는 꿈을 꾸어본다. 이것은 아마도 과거의 신상옥과 임권택, 그리고 오늘날 이창동의 숨겨진 야망이었을 것이다. <출처: 인디와이어>
81세로 세상을 떠난 피에르 르시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버라이어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쿠엔틴 타란티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등 세계 영화계 인사들과 오랜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영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한국영화를 유럽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해오기도 했다.
칸영화제 측은 “피에르 르시앙은 5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칸영화제란 세계적인 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였다. 지구 멀리 떨어진 나라의 영화를 선보이기 위해 자신의 창의력을 그간 아낌없이 발휘했던 인물이다. 그는 강렬하고 독창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어 우리에게 기쁨과 갈망을 선사했다”고 추모했다.
올해 칸영화제는 ‘버닝’에 남다른 관심을 표하는 분위기다. “2018년은 반드시 ‘그의 해’가 될 것”이라며 이창동 감독에 대해 각별한 코멘트를 전하기도 했다. 경쟁부문 진출작인 ‘버닝’의 공식 상영은 영화제 후반부에 배치됐다.
‘버닝’은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유아인)가 어릴 적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를 만나고, 그녀에게 정체불명의 남자 벤(스티븐 연)을 소개 받으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는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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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