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살만한 세상] 재회한 ‘부산 폭행’ 여중생과 천종호 판사… 그리고 ‘카네이션’

입력 2018-05-09 16:50 수정 2018-05-10 08:20
천종호 판사 페이스북 캡처

소녀는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또래 친구 두 명은 차가운 공사장 바닥에 앉은 소녀를 마구잡이로 때렸습니다. 유리병, 철제 의자 등이 사방에서 날아왔습니다. 단지 소녀가 두 달 전 있었던 그들의 ‘1차 폭행’을 경찰에 신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 폭행의 이유는 더 황당했습니다. 소녀가 둘 중 한 명의 남자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아서였습니다. 다섯 명이 몰려와 공원과 노래방에서 소녀를 괴롭혔습니다. 슬리퍼와 마이크. 그들의 손에 잡히는 건 모두 끔찍한 ‘무기’가 됐습니다.

이 사건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고, 가해자들이 법정에 서게 됐을 때 많은 국민이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소년법 적용 대상인 만 19세 미만의 가해 학생들에게 혹여나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질까 염려해서였습니다. 이때 소년범 사건을 주로 다뤘던 부산지방법원의 ‘호통 판사’, 천종호 판사가 등장했습니다.

“개랑 돼지도 이렇게 때리면 안 돼. 진심으로 사과해”

첫 재판이 열렸던 지난해 10월 19일 천 판사는 가해 학생들을 이 같이 꾸짖었습니다. 몸보다 마음을 더 다친 소녀에게는 “너 내 딸하자. 힘들면 언제라도 연락해”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습니다. 도와줄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상처투성이 맨발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견뎠던 고작 14살짜리 소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생긴 겁니다.

7개월쯤 지난 8일 어버이날, 소녀는 붉은색 카네이션을 들고 천 판사를 찾았습니다. 수줍었는지 아무 말 없이 꽃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천 판사는 소녀를 만난 소감을 페이스북을 통해 전했습니다. “꽃이 예뻤고 머리가 가지런히 정리된 아이가 예뻤다. 학교를 잘 다니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놓였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온을 되찾는다.”

천 판사는 지난 2월 소녀가 재판 후 자신에게 보냈던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소녀는 법정에서 천 판사의 호통을 듣고 자신에게 사과한 가해 학생을 용서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이 마음고생 했을 거라 생각하니 오히려 미안했다고 합니다.

소녀는 천 판사의 진심 덕분에 다시 일어섰습니다. 이제 눈부신 성장소설을 그려갈 테지요. 그리고 그 첫 장은 천 판사가 소녀에게 했던 격려로 장식될 겁니다. 마지막 장은 붉은 카네이션의 꽃말처럼 ‘깊은 사랑’과 ‘애정’이 넘치는 내용으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홀로 외로웠던 소녀가 웃음꽃 핀 얼굴로 행복해하는 이야기 말입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