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주 북미정상회담의 판문점 개최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했다. 트위터에 연달아 글을 올려 판문점이 ‘역사적 장소’임을 강조했다. 지난달 28일 밤 문재인 대통령과 통화할 때 트럼프는 판문점 ‘평화의집’과 ‘자유의집’의 차이점 등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일주일이 채 안 된 5일(현지시간) 그는 미 오하이오주에서 열린 감세 관련 행사에 참석해 “북미정상회담의 시간과 장소가 모두 결정됐다. 우리는 날짜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전날 기자들에게 회담 일정이 정해졌다고 말한 것을 재확인한 발언이었다. 물론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워싱턴 기류에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북미정상회담의 ‘판문점’ 카드가 후퇴하고 ‘싱가포르’가 개최지로 부상했다. 워싱턴 외교가에선 미국이 당초 희망했던 싱가포르가 회담 장소로 최종 낙점되리란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참모들이 판문점 개최를 반대하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판문점 개최를 트럼프의 참모들이 꺼린다는 대목은 북미정상회담을 미리 전망해볼 하나의 단초가 될 수 있다. 역사성과 상징성,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치러 각종 인프라까지 갖춰진 데다 대통령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장소를 백악관 보좌진은 왜 망설이는 걸까.
◆ 판문점 ‘상징성’이 오히려 부담스럽다?
미국 대통령이 해외순방에 나서면 보통 한 달쯤 전부터 경호팀과 실무진이 해당 국가에 가서 준비작업을 시작한다. 대통령과 대규모 수행단이 머물 숙소부터 세밀한 동선까지 일일이 챙기며 안전과 경호체계를 점검하는 것이다. 몽골 울란바토르가 북미회담 장소로 검토됐다가 사실상 배제된 것도 미국 대통령이 움직이기엔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백악관은 일찌감치 싱가포르를 염두에 두고 회담을 준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싱가포르는 대규모 국제행사가 수시로 열릴 만큼 다양한 시설이 갖춰져 있고 치안도 매우 양호하다. 평양에서도 비행시간이 그리 길지 않아 미국과 북한을 배제할 경우 최적의 북미회담 장소가 될 수 있다. 남은 변수는 판문점이었고, 트럼프 대통령이 그 카드를 꺼내 드는 듯했다.
판문점은 싱가포르 못지않은 서울의 인프라를 이용할 수 있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도 이미 남북정상회담을 해본 터여서 마다하지 않을 장소다. 회담장이 협소하긴 하지만 그곳이 갖고 있는 상징성은 이를 상쇄하고 남는다. 경호 문제도 한국 정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갖춰놓은 시스템을 넘겨받으면 수월하게 풀릴 수 있다.
그럼에도 백악관 참모들이 판문점을 꺼린다면 추정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이미 ‘싱가포르 회담’ 준비가 상당히 진척된 터라 일거에 뒤집는 게 물리적으로 어려울 수 있다. 미수교 국가와의 회담에 대통령이 직접 나설 때 미국 정부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대통령의 안전이다. 백악관의 매우 복잡한 경호시스템을 싱가포르 현장에 최적화시키는 작업이 이미 진행됐고 상당부분 검증도 이뤄졌다면 참모들이 급작스런 변경에 난색을 표하는 건 당연하다.
물리적 요인과 다른 차원의 이유로는 ‘정치적 위험부담’이 꼽힌다. 북미정상회담이 양측 이해관계를 충족시켜 성공적 합의로 이어진다면 판문점은 최고의 장소가 된다. 과거 전쟁을 벌였던 분단의 현장을 평화 선언의 무대로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물이 그에 미치지 못할 경우 이 공간의 상징성은 오히려 짐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더라도 판문점이란 장소가 기대감을 한껏 높인 터라 빛이 바랠지 모른다. 반면 제3국인 싱가포르는 이런 주변 요인을 배제한 채 오롯이 회담에 집중하고 그 결과물로 평가받게 된다는 장점을 가졌다.
◆ 트럼프 “회담 날짜·장소 곧 발표할 것”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자"는 특유의 말버릇과 함께 "우리는 북한과 끊임없이 접촉하고 있다. 실제로 시간과 장소를 결정했으며 모두 합의가 됐다. 곧 발표될 것"이라고 밝혔다.
시점은 ‘5월 말~6월 초’에서 ‘5월 중순’으로 앞당겨졌다가 다시 ‘6월’ 가능성이 높아진 상태다. 북미정상회담 전에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이 5월 22일로 확정됐다. 따라서 북미회담은 일주일쯤 뒤인 5월 마지막 주에 하거나 아니면 6월로 넘어가게 되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회담 장소가 판문점일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본다. 결정권자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서 북미정상회담 제안을 전달받고 즉석에서 수락했던 것처럼 회담 개최지도 결국 그가 결정할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갖고 그 성과를 역사에 남기고 싶어 한다는 건 이미 여러 차례 확인됐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