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트렌드] 55세 태영씨의 ‘도전 골든벨’… 발달장애인 ‘자립

입력 2018-05-04 07:15
김태영씨(왼쪽)가 지난달 12일 서울 강남구 국기원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퀴즈대회 '함께 울려요 도전 골든벨'에서 박상규씨와 함께 최후 3팀에 오른 뒤 감격에 겨운 듯 양손으로 입을 감싸고 있다. 충현복지관 제공

35세 되던 해 장애 있다는 것 처음 알아 언니가 공부·가계부 쓰는 법 등 가르쳐
부모님 돌아가신 후 언니 건강 크게 악화 ‘골든벨’ 참가… ‘매니페스토’ 못 맞혀 2위

발달장애인·장애아동 등 복지 향상이 대선공약임에도 올 지원 예산 되레 줄어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靑 청원 올라와 “홀로서기 노력에 정부가 관심 가져주길”


"보통선거, 직접선거… 평등선거 또…." 엄지부터 하나씩 접히던 왼손가락은 약지에서 멈췄다. 몇 초가 지나서야 "아, 비밀선거" 하고 네 번째 손가락을 접는다. 그는 예상문제 중 "선거 4가지가 제일 어렵다"고 했다. 4개의 단어. '선거'라는 말을 빼면 고작 여덟 글자인데 외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김태영(55·여)씨는 발달장애를 갖고 있다. 발달장애인 골든벨 퀴즈대회를 앞두고 있었다. 5년째 출전이지만 언니와 떨어져 산 뒤로는 첫 대회다.

하나 남은 가족, 언니 김태분

김태영씨(오른쪽)와 박상규씨는 발달장애인 퀴즈대회 '함께 울려요 도전 골든벨'에서 2위인 실버벨상을 받았다. 권중혁 기자


어머니는 2005년 돌아가셨다. 파킨슨병을 오래 앓다가 어느 날 넘어져 척추가 다 부러졌다. 병원 신세를 지다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2016년에 돌아가셨다. 그 전부터 오랜 기간 치매를 앓았다. 태영씨에게 남은 가족은 언니 김태분(60)씨뿐이다.

태분씨는 “태영이가 ‘원래 그런’ 아이로 자랐다”고 했다. 태영씨는 서른 넘어서까지 집 밖으로 나간 적이 거의 없다. 태분씨는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부모님이 옛날 사람이라 그런지 ‘그냥 놔둬라’고만 했고 태영이도 나가는 걸 싫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생은 사회성이 제로였다”고 말했다.

1998년 6월 30일, 태분씨는 부모와 살던 태영씨를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였다. 두 사람이 각각 40세와 35세 되던 해였다. 태영씨에게 장애가 있다는 걸 확인한 것도 그해였다.

그때부터 동생에게 공부를 시켰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랬다고 한다. 교회에 다니는 태분씨는 동생에게 매일 성경을 필사하도록 했다. 여태껏 부족했던 사회 경험을 채워주려 박물관과 미술관에 다녔고 소방관 체험학습 등 다양한 활동을 함께했다. 은행에서 돈 찾는 법, 가계부 쓰는 법도 가르쳤다.

그러면서 ‘동생보다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태분씨는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는 다 똑같다. 내가 부모는 아니지만 나 떠난 뒤에는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태분씨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는 수년간 가장 역할을 하며 체력이 소진된 탓인 것 같다고 했다. 결국 지난해 2월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선 미란성 위염, 위축성 위염이라고 했다. 일반적인 위염이었지만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심리적 요인이 컸다. 병원을 4곳이나 전전했는데 “더 이상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그 사이 50㎏이던 몸무게가 35㎏까지 줄었다.

지난해 4월 4일 태분씨는 병원 다니길 그만뒀다. 2주 뒤 포기하는 심정으로 서울 강남구 수서동 집에서 친구가 목사로 있는 인천 남구의 교회로 거처를 옮겼다. ‘동생 옆에서 죽을 수는 없어서’ 20년 만에 동생과 떨어져 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인천으로 간 뒤 건강이 호전됐다. 여전히 한여름에 옷을 4∼5개 껴입을 정도로 몸이 안 좋지만 한 숟갈도 못 먹던 이가 미음을 삼키기 시작했다. 태분씨는 “언젠가는 동생과 떨어질 텐데, 태영이가 자립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라는 계시였던 것 같다”고 했다.

현재 두 사람은 1주일에 한 번, 주로 토요일에 얼굴을 본다. 태분씨는 “태영이한테 매번 혼자 사는 게 괜찮으냐고 물어본다. 동생은 ‘괜찮아. 그런데 언니가 좀 보고 싶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언니와 떨어진 뒤 첫 골든벨대회

장애인의 날을 앞두고 열린 이 대회에는 전국 35개 장애인 관련 기관에서 98개팀이 참가했다. 충현복지관 제공

보기 드물게 맑은 날이었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국기원에선 푸른 하늘 아래로 벚꽃이 남실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이곳에서 전국 발달장애인 퀴즈대회 ‘함께 울려요, 도전 골든벨’이 열렸다.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맞아 강남구가 후원하고 충현복지관이 주관했다. 올해 주제는 ‘자립’이었다.

발달장애인 골든벨은 2인 1조로 문제를 푼다. 태영씨는 같은 복지관의 박상규(48)씨와 한 팀이 됐다. 두 사람은 흰색 긴소매 폴로셔츠를 맞춰 입었다. 올해 첫 출전인 상규씨는 “사람이 많은 곳에 나가려니 많이 떨리고 무섭다”고 했다. 태영씨는 “즐겁게 하자”고 다독였다.

같은 시간 태분씨는 인천에서 기도를 했다. 지난해까지는 매일 밤 함께 퀴즈 연습을 하며 동생을 도왔지만 올해는 그러지 못했다. 태분씨는 “아직 몸이 좋지 않아 응원 가기가 힘들다”며 “대신 동생이 잘하라고 오전 내내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날 대회에는 전국 35개 장애인 관련 기관에서 98개 팀이 참가했다. 태영씨와 상규씨는 참가번호 ‘80’이 적힌 푸른 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두 사람은 선수 입장 전까지 예상문제를 묻고 답했다. 흰색 A4 용지로 인쇄한 예상문제지 곳곳에는 연필과 볼펜이 지나간 흔적, 손때가 묻어 있었다. 왼편 상단에 찍은 스테이플러 심은 이미 떨어졌고 임시로 붙여둔 테이프도 위태해 보였다.

태영씨와 상규씨는 이날 공동 2위에 올랐다. 마지막 문제는 ‘정당 및 후보자가 선거에서 구체적인 목표, 이행 방법, 재원 조달 방안 등을 명시한 공약’을 뭐라 일컫는지 묻는 주관식 문제였는데 두 사람의 화이트보드는 빈칸이었다. 답은 매니페스토(manifesto)였다.

골든벨을 울리진 못했지만 두 사람은 기뻐했다. 태영씨는 손가락으로 연신 ‘V’자를 만들어 보이며 “2등”이라고 자랑했다. 상규씨는 상장을 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태분씨는 동생의 수상 소식에 “딸이 수능 보는 엄마처럼 기도했다”며 “동생이 열심히 잘해줘 고맙다. 혼자서는 어디 가는 것도 못했던 동생이 180도 달라진 모습을 보는 게 좋다”고 말했다.

대회 전부터 태영씨는 입상하면 언니에게 용돈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런 동생에게 태분씨는 “정말 고맙다. 언니가 (용돈을) 안 받아도 벌써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제가 아프고 기초수급비 받아 생활하니 동생도 형편이 어려운 걸 안다.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면서 “뿌듯하면서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매니페스토

태영씨는 지적장애 3급이다. 발달장애인 중에는 상황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그가 도움을 받는 충현복지관 관계자는 “태영씨의 경우 겉으로만 보면 장애인인 줄 모른다”고 했다. 그런 태영씨도 20년이나 언니의 보살핌을 받아야 했고 이제 세상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이 아주 조심스럽다.

지난 3월 23일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 도입해 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글쓴이는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전국장애인부모연대와 매니페스토 협약을 통해 발달장애인·장애아동 등의 복지 향상을 위한 구체적 정책을 약속했다”고 썼다. 매니페스토. 태영씨가 골든벨대회에서 틀린 문제의 답이었다.

글쓴이는 “발달장애인법 이행을 위해 매년 427억∼815억원, 5년간 3092억원이 필요하지만 2018년 복지부 예산안에는 85억원만 반영됐다”며 “정부는 법률로 정한 발달장애인의 권리를 다시 외면하고 가족 책임으로 떠넘길 것인가. 수많은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삶을 포기하는 상황까지 내몰리고 있다”고 썼다.

이 청원은 장애인의 날 이틀 후인 지난달 22일 마감됐다. 청원에 참여한 사람은 6701명.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나흘 후인 26일 마감된 같은 제목의 청원은 3만1191명에 그쳤다. 모두 청와대 답변을 듣지 못했다. 하루 뒤인 27일, 역시 같은 제목의 청원이 또 올라왔고 2일 오후 3시55분 현재 18명이 참여했다. 우리 주변의 수많은 ‘태영씨’는 과연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