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은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두 정상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였다. 공식적인 회담은 오전에 100분간, 오후에 그와 비슷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그리고 A4 용지로 2장이 넘는 긴 분량의 판문점 선언문이 나왔다.
총 3개조 13개항의 장황한 합의 내용을 두 정상이 이날 만들어냈을 가능성은 없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이끌어낸 문구는 ‘완전한 비핵화’와 ‘종전선언·평화협정’ 정도였을 것이다. 군사와 경제 분야의 방대한 어젠다는 두 정상을 수행한 양측 대표단이 도출해낼 몫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장면이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을 따라 온 북측 공식 수행원 중 3명이 공식 환영식 사진촬영을 마친 뒤 북으로 돌아갔다. 즉석에서 이뤄진 사진촬영도 김 위원장이 “지금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이뤄진 것이었다. 회담에 참석하지 않고 돌아간 수행원 중에는 북한군 리명수 총참모장과 박영식 인민무력상이 포함돼 있었다.
당초 이들이 북측 공식 수행원 9명 명단에 포함됐을 때 송영무 국방부 장관, 정경두 합참의장의 카운터파트로 군사 분야 합의문을 작성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그런 자리는 마련되지 않았다. 이는 판문점 선언문의 상당 부분이 사전에 조율됐다는 관측을 뒷받침한다. 합의 내용의 90% 이상은 이미 문구작업까지 완료됐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도 있다.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이 부드럽고 원만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것은 치밀한 사전조율의 결과물로 봐야 한다.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곧 일정이 확정될 북미정상회담도 비슷한 조율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조짐이 연일 포착되고 있다.
◆ “美 핵전문가 3명 방북… 北 ‘전면 폐기’ 의사 밝혀”
북한이 북미정상회담 사전조율을 위해 방북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당국자 및 핵전문가 3명에게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포함한 핵무기의 전면 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미 소식통을 인용해 3일 보도했다.
CIA 당국자와 핵 전문가 3명이 북한을 방문한 시점은 4월 하순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3명은 약 1주일간 북한에 머물며 북미정상회담을 조율했다. 신문은 핵무기 전면 폐기에 관한 내용이 북미 정상회담 합의문에 포함될 것으로 전망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CIA 국장이던 4월 초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했다. CIA 당국자 및 핵 전문가의 방북은 폼페이오 장관이 확인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폐기 의지를 구체적, 실무적으로 검증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아사히신문은 북한의 비핵화 절차와 보상 등에 대해 북미정상회담 이후 실무협의에서 세부사항을 정하는 방안을 양측이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폼페이오 “북핵 폐기, 전례 없는 기회”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일(현지시간) "우리는 한반도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워싱턴 국무부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이 같이 말하며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이 문제(북핵)를 해결할 때가 왔다. 우리는 북한의 대량파괴무기를 지체 없이 영구적으로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제거할 것을 약속한다. 그렇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나쁜 합의를 하는 것은 옵션이 아니다"라며 미국인들은 이 문제를 미국 정부가 바로잡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행정부는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라며 "'기회'라는 말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러한 작업의 시작 단계에 있고 결과는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도 했다.
◆ ‘큰 그림’은 이미 나온 듯
미국과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와 체제보장을 주고받는 로드맵에 상당부분 의견 접근을 이뤘다는 분석은 잇따라 나오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에서 핵 폐기 프로세스를 일괄 타결하고 이행 단계를 최대한 압축하면, 올해 중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보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됐다.
북·미 간 핵 담판이 속도를 내고 있다는 신호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우선 트럼프 대통령이 적극적이다. 그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북한과의 회동이 3~4주 내에 열릴 것”이라며 정상회담 시기를 5월 중으로 확정한 데 이어 다음 날엔 판문점을 회담 장소로 거론했다. 판문점 카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공개 제안했지만 당시 미측 반응이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홍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시기를 앞당기고 장소도 서둘러 정하려는 이유는 남북 정상회담 성과에 고무된 측면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물밑에서 진행된 북·미 간 다양한 교감에서 자신감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홍 실장은 “단순히 비핵화 문제를 합의하는 수준이 아니라 타결 이후의 이행 과정에 대해서도 북·미 간 상당한 조율이 이뤄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북·미 간 비핵화 담판의 핵심은 이행 단계를 최대한 압축하는 것이다. 동결, 불능화, 폐기로 단계를 나눠 시한을 정하고 그 대상을 명시해 일괄타결하는 게 필수다. 문제는 각 단계별로 북한도 얻는 것이 있어야 빅딜이 가능한데,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하는 ‘과거의 실패’에 해당한다.
한 외교소식통은 “미국이 원하는 CVID 수준이 100이라면 현실적으로 북한이 이를 단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다”며 “북한이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렀을 때 제재 완화, 관계 정상화 등 보상을 제공할지가 남은 쟁점”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행시기를 최대한 앞당긴다면 미 중간선거가 있는 11월 전에 북한의 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보상이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선 핵 폐기 후 보상’의 리비아식 해법을 고집해온 존 볼턴 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과 리비아의 핵 능력 차이를 인정하는 발언을 한 것도 단계별 보상이 불가피한 상황을 일정부분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 대남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이날 “선의에는 선의로 대답하는 것이 옳은 처사”라며 비핵화 결단에 대한 미국의 호응을 촉구했다.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로 한 정치 일정도 묘하게 맞물려 있다. 판문점 선언에 담긴 종전 선언이 이르면 정전 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에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미 중간선거 지형이 8월이면 윤곽이 잡힌다는 점을 고려하면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그 전에 북핵 문제에서 성과를 거두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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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