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국정 역사 교과서 폐기 이후 만든 새 교과서 가이드라인에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란 내용을 삭제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유엔 감시 하에 총선거가 치러진 한반도 남쪽 지역만의 합법정부라는 의미다.
교육부는 2일 평가원이 만들어 교육부에 보고한 중학교 역사-고교 한국사 교육과정 및 집필 기준 시안을 공개했다. 교육부는 평가원의 시안을 바탕으로 역사과 교육과정심의회 등 내부 논의를 거쳐 상반기 중 집필 기준을 확정한 뒤 7월 초 고시할 예정이다. 집필 기준은 검정 교과서 집필진이 준수해야 할 가이드라인이다.
평가원은 현행 집필 기준에 명시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론(論)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학생에게 가르쳐서도 안 된다고 판단했다. 진보 역사학계는 1948년 12월 유엔총회 결의에 언급된 ‘유일 합법정부’의 인정 범위를 한반도 남쪽으로 국한해 해석한다. 보수 역사학계는 범위를 한반도 전체로 보고 대한민국만 유일 합법정부라고 본다. 남북한 정통성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해묵은 논쟁에서 평가원이 진보 역사학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란 표현은 민주주의로 수정됐다. 보수 진영은 자유를 빼면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나 사회민주주의와 구분이 모호해진다는 등의 이유로 반대한다. 평가원은 자유민주주의가 유신 헌법의 잔재이고 과거 국정 교과서나 현행 사회과 교과에도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혼용됐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평가원은 1948년 총선거와 헌법 공포, 정부 수립 선포 과정의 역사적 의미를 ‘대한민국 수립’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수정했다. 이 역시 1948년 건국 입장을 택하면 항일투쟁의 역사와 임시정부 법통을 부인하는 우를 범한다는 진보 역사학계의 시각을 반영했다. 보수 역사학계는 주권과 영토, 국민이 갖춰진 실질적인 국가가 탄생한 시점으로 봐야 한다고 맞선다. 6·25 전쟁과 관련해서는 ‘남침으로 시작된’이란 표현을 명시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도발은 집필 기준에서는 빼고 교과서 집필진이 재량껏 기술하도록 맡기기로 했다. 평가원은 집필 기준에 이를 일일이 열거하면 집필에 불필요한 제약을 준다고 주장했다. 집필 기준에 굳이 넣지 않아도 역사 서술의 흐름상 빠지기 어렵다는 게 평가원의 논리다. 북한의 독재 세습체제와 북한 인권, 베트남 참전과 새마을운동도 비슷한 논리로 삭제했다.
동북공정도 빠졌다. 평가원은 “동북공정 용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면 동아시아 갈등이 동북공정으로만 한정돼 교과서에 서술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평가원 시안은) 교육부가 평가원에 의뢰한 연구용역 보고서로 봐야 타당하다”며 “전문가로 구성된 역사과 교육과정심의회와 행정예고 기간을 통한 여론 수렴을 거쳐 집필 기준을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도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