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만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에서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알리는 ‘판문점 선언’이 도출됐다. 남북 분단과 정전체제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 전쟁을 끝내고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분단과 전쟁으로 굳어진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전쟁과 평화의 갈림길에서 만든 이번 합의는 과거 남북 정상회담과 달리 이행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도 모두발언에서 과거 합의 불이행의 문제점을 인정하며 실천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북한이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직후에 비핵·평화 프로세스를 시작했기 때문에 합의 이행의 실패는 곧 전쟁을 의미할 수도 있어 반드시 이행해 나가야 한다.
2018 남북 정상회담 의제는 비핵화, 평화정착, 남북관계 발전이다. 비핵화와 평화정착 문제는 상호 연계돼 있다. 이번 회담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고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를 남과 북이 주도적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두 정상이 새로운 평화시대를 열어야 한다는데 공감대를 이뤘다.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새로운 시작을 알리고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긴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비핵·평화 프로세스의 큰 틀에서 보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은 한 꾸러미에 들어 있다. 북핵문제의 지정학적 성격을 고려할 때 한국전쟁 종식을 위한 평화 프로세스가 제대로 추진된다면 세계사적인 대전환을 가져올 수도 있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해야 북․미정상회담도 성공할 수 있다. 두 회담이 잘 되면 남북한과 미국 3자 또는 중국을 포함한 4자, 러시아 일본을 포함하는 6자 정상회담으로 이어져 동북아 다자안보 협의체제 구축까지 가능할 것이다.
그동안의 역사적 경험에 의하면 북한과 합의한 비핵화 프로세스와 남북 합의는 모두 사문화됐다. 합의파기의 책임이 전적으로 북한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북한과 합의한 모든 합의문이 ‘빈 종잇장’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이번 합의도 잘 이행될 수 있을지 우려하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추진은 과거 우리가 해왔던 경로의존성에서 벗어나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이번 정상회담은 남북관계 복원과 함께 비핵화 문제를 주의제로 다뤘다. 1991년 남북 비핵화공동선언 이후 남북대화 의제로 다루지 못했던 핵문제를 남북 정상이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비핵화가 남북대화 의제로 자리 잡은 것이다. 우리 정부가 운전석에 않아 비핵·평화 프로세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북핵의 가장 직접적 위협대상인 우리 정부가 나서 북한의 조건부 비핵화 의지를 재확인하고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정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다. 남북이 주도해야 비핵화 협상의 성공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출발이 좋다.
둘째,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모두 각국의 임기 초반에 이뤄지기 때문에 합의이행의 구속력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북핵 합의와 남북 합의가 이행되지 못한 이유 중에는 한국과 미국의 정권교체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페리프로세스가 중단된 것은 조지 W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북한불량국가론과 붕괴론이 부각하면서 대화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2007년 10·4 정상선언도 이명박정부 출범과 함께 사문화됐다.
셋째,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포하고 ‘사회주의 경제건설 총력 집중’이란 새로운 전략을 추진하기로 함으로써 핵무력 고도화를 위해 지속해 왔던 전략도발을 자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반도 긴장 고조의 주된 요인은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와 관련한 연이은 전략도발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핵·미사일 시험 중단과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를 결정하는 등 당분간 전략도발을 자제할 가능성이 높아 합의이행에 장애가 나타날 가능성이 줄어들었다.
북한이 경제우선의 새로운 전략노선을 제시하고 비핵화 초기 동결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했고, 당의 기본노선으로 경제우선주의를 표방했기 때문에 인민들의 허리띠를 조여 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효율성을 발휘해야 한다. 자력갱생의 자립경제로는 경제적 성과를 내기 어렵다. 과학기술과 교육을 강조하면서 지식경제시대(4차 산업혁명시대)를 열고자 하지만 비핵화를 통한 대외관계를 풀지 못하면 효율성을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의 시장화 진전에 따른 변화욕구 등 북한의 내부적 요인도 합의 이행을 강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고유환(동국대 교수. 북한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