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장은 작심한 듯 보였다. 이 말을 하기 위해 많이 기다렸다는 듯 꺼내는 말마다, 보여주는 몸짓마다 ‘평화’ 메시지를 한껏 담았다. “허심탄회하게, 진지하게, 솔직하게” 얘기하자며 문재인 대통령에게 긴 모두발언을 건네면서도 평화를 말했다.
◆ “평화와 번영의 북남관계”
두 정상은 오전 10시15분쯤 회담장에 마주앉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멀리서 오셨으니 인사 말씀 먼저 하시죠”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하하” 웃으며 “아까 다 드렸던 마음가짐 가지고 이 200m 짧은 거리를 오면서, 아까 말씀드렸지만 정말 분리선을 넘어보니까 분리선도 사람이 넘기 힘든 높이로 막힌 것도 아니고 너무나 쉽게 넘어온 분리선을 가지고 여기까지 역사적인 이 자리까지 11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오늘 걸어오면서 보니깐 왜 이렇게 그 시간이 오래 걸렸나. 왜 오기가 이렇게 힘들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이어 “오늘 역사적인 이 자리에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기대하시는 분들도 많고 지난 시기처럼 아무리 좋은 합의나 글이 나와도 그게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런 만남을 가지고도 좋은 결과가 좋게 발전하지 못하면 기대를 품었던 분들에게 오히려 낙심을 주지 않겠나”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그래서 앞으로 정말 마음가짐을 잘하고 정말 우리가 잃어버린 11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수시로 만나서 걸린 문제를 풀어나가고 마음을 합치고 의지를 모아서 나가면 우리가 잃어버린 11년이 아깝지 않게 좋게 나가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속에서 200미터를 걸어왔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평화’를 말했다.
김 위원장은 “오늘 이 자리에서 평화와 번영의 북남관계가 정말 새로운 역사가 쓰여지는 그런 순간에 이런 출발점에서 서서 그 출발점에서 신호탄을 쏜다 하는, 출발 신호탄을 쏜다하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여기 왔다. 오늘 현안 문제들을 툭 터놓고 이야기하고, 그래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자”고 했다.
또 “지난 시기처럼 또 원점에 돌아가고, 이행하지 못하고, 이런 결과 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마음가짐을 잘하고 미래를 내다보면서 지향성 있게 손잡고 걸어가게 되는 계기가 돼서, 기대하시는 분들의 그 기대에도 부응하자”면서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을 되풀이하지 말자’고 했다.
◆ 방명록에 ‘평화의 시대’
김정은 위원장은 평화의집 1층에 마련된 방명록에 “새로운 역사는 이제부터. 평화의 시대, 역사의 출발점에서”라고 썼다. 남한을 찾아 밝힌 첫 메시지부터 ‘평화’였다.
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과 오전 9시41분 남북정상회담 장소인 평화의 집으로 들어갔다. 전통 해주소반을 본뜬 서명대 앞 의자에 앉아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건네준 만년필로 방명록에 이같이 적었다. 문 대통령은 옆에 서서 ‘백두체’로 글을 쓰는 김 위원장을 지켜봤다. 기념촬영 직후인 9시44분 두 정상은 환담 장소인 접견실로 들어갔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5일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등 우리 측 특사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고 밝힌 바 있다. 김 위원장은 회담에서도 “원점 돌아가기 보다 미래 내다보자”며 지속적인 평화체제 구축안 마련을 시사했다.
역사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는 앞으로 이어질 북·미 정상회담과 이후 진행될 국제사회와의 협력까지도 고민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단편적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지속적으로 진전시키고 논의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남측은 ‘판문점 선언’을 희망하고 있다. 합의 수준에 따라 평화의집 앞에서 정식 발표 혹은 서명, 실내에서 간략 발표될 수 있다.
조선중앙통신도 이날 “김정은 동지께서는 문재인대통령과 북남관계를 개선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이룩하는데서 나서는 제반 문제들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론의하시게 된다”며 전향적인 의사를 밝혔다.
◆ 김정은, 문 대통령 손잡고 북한 땅으로
이날 남북 정상은 남한에서 만났고, 북한에서도 만났다. 5㎝ 높이의 경계석을 서로 넘나들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오전 9시30분 판문점 군사분계선(MDL)에서 콘크리트로 된 5㎝ 높이의 군사분계선 경계석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나눴고 사진을 찍었다.
김 위원장은 발걸음을 옮겨 남측으로 넘어왔다. 1953년 분단 이후 북한 최고지도자가 남한 땅을 밟는 것은 처음이었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1차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에 방문한 지 18년 만의 답방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대통령의 ‘방북’도 이뤄졌다. 김 위원장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으로 다녀오지 않겠냐고 즉석 제안한 것이었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손을 잡고 5㎝ 경계석을 넘어 북측 땅을 밟았다. 이로써 문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북한을 ‘방문’한 세 번째 대통령이 된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첫 마디는 “반갑습니다”였다. 김 위원장은 검은색 인민복을 입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채 등장했다. 김 위원장은 함께 방남한 북측 인사들 정 가운데에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여동생 김여정 제1부부장은 회색 정장을 입은 채 김 위원장의 뒤쪽에 위치했다.
김 위원장과 문 대통령은 마주서서 악수를 나누었다. 김 위원장은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건냈다. 이들은 손을 잡은 채로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김 위원장이 돌발 제안을 했다. 문 대통령 손을 잡고 북측 군사분계선을 넘어간 것은 남한과 북한의 경계를 없애자는 의도로 풀이된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