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 60. 극단 프랑코포니 ‘아홉소녀들’ 이야기

입력 2018-04-26 07:26

연극포스터가 눈이 들어왔다. 그동안 많은 포스터가 스쳐갔지만 강렬했다. 텍스트 풍경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숫자에 갇혀있는 소녀 얼굴이 섬뜩하다. 무표정한 얼굴, 심연과 내면이 파괴된 상처가 연기처럼 몸속으로 전이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다. 연극 <아홉소녀들>이야기다.

극단 프랑코포니 창단 10주년 공연 <아홉소녀들> 프랑스에서 연출·배우·작가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드린느 로쉬 희곡<2011>을 임혜경 대표가 번역과 드라마투르기를 맡았다. <무대게임>(2014), <이아이>(2015), <두 코리아의 통일>(2016), <벨기에 물고기>(2017)등 프랑스 연극을 한국무대에 소개하고 있는 까띠라뺑(외국어대 불문과 교수)이 연출을 맡아 성폭력, 비만, 자살, 소외, 왕따, 차별, 죽음, 외모,아동폭력, 살인,가족문제, 알코올중독 등 사회현상들을 23개 옴니버스 놀이극으로 풀어가는 연극이다.

지난해 극단 프랑코포니는 <벨기에 물고기>로 시선을 받았다. 정체성이 부재한 여장 남자 <동성애자>와 부모의 사고로 기억이 상실되고 정신 분열을 앓고 있는 한 소녀와 우연히 만나면서 기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부모로부터 결핍된 모성애를 가지고 있는 소녀는 특별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동성애자도 성(姓) 정체성이 부재한 상태로 내면의 외상과 결핍으로 치유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연출은 두 인물 중심으로 극도로 손상 된 자아 찾기에 나서면서 과거 기억을 소환해 각자의 상처를 마주보며 결핍의 내면과 자아정체성을 치유해 나가는 2인극으로 주제와 표현 형식이 신선함을 주었던 작품이다.

놀이극으로 바라보는 어른들 세계, 아이들의 시선 ‘아홉소녀들’


<아홉소녀들>은 작가가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창작워크숍을 통해 경험한 아이들이 바라보는 어른들의 이야기 혹은 ‘나’(아동·청소년)의 불안전하고 도발적인 세계와 사회 현상들을 담고 있는 연극이다. 극 속에 등장하는 아홉 소녀들은 실제 보고 경험을 한 듯 ‘나’로 출발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균열된 정체성, 결핍, 가족의 부재와 혼돈, 부모의 문제로 폭력성과 잔혹성을 보이기도 하는 에피소드에서는 아이들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의 세계이며, 자신으로 전이된 내면성을 들어낸다. 배우들을 역할 바꾸기로 문제의 사례와 시선들을 ‘~되어보기’를 체험하면서 다른 이야기로 변주된다.

무대는 간소하다. <아홉 소녀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공간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 숫자가 뒤섞여 있는 무대 뒤편 판넬과 작고 큰 철제 사다리, 나무박스 몇 개가 전부다. 배우 한명이 나와 이야기놀이에 필요한 인원(숫자)을 말하면 이야기에 참여하고 싶은 배우가 23개 옴니버스를 변화시키며 여섯 명의 여자배우와 남자배우 세 명이 <아홉 소녀들>을 연기한다.

연극은 마치 성인 남·녀 배우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아이들 세계에 진입 하려는 의식행위를 보이며 등·퇴장으로 분리되지 않는 공간으로 이동해 도발적인 빨간색 교복과 짧은 치마, 동일한 운동화를 신으면서 극은 시작된다.

놀이극에서 배우들에 의해 재현되는 <아홉소녀들> 이야기는 가족, 집단, 개인, 타자, 사회현상과 환경으로 연결되는 문제들이다. 가족애가 부재한 한 아이는 죽어서 부모 관 사이에 자기 관을 놓고 싶다고 말하고, 부모가 이혼한 한 아이는 엄마, 아빠와 행복 하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 또 다른 아이는 자동차 사고로 부모가 죽었다고 말하고 부모의 불륜을 고백하는 아이도 있다. 살아가는 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아이는 차라리 죽는 게 났다고 말하는 식이다.

‘아홉소녀’ 이야기의 섬뜩함


아이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현상과 이야기는 도발적이고 폭력적이며 섬뜩하다. 동성애, 낙태, 부모의 일탈, 이혼, 외모, 노동자, 죽음 등 역할놀이로 표현되는 이야기 풍경은 아이들이 인식하고 바라보는 세계다. ‘나’의 이야기는 또 다른 배우의 극중 경험을 통해 ‘너’의 경험과 시선들로 채워진다. 인물들이 들려주는 고통과 통증을 따라가다 보면 ‘너’(아홉소녀들)의 이야기가 ‘나’(자신)의 경험과 시선으로 인식하게 된다.

남자배우 세 명이 참여해 아홉소녀들을 연기하며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가해의 폭력성과 피해의 통증이 특정한 젠더로만 연결 될 수 없다는 점으로 에피소드를 연결하고 있다. 이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파괴된 내면의 현상이 남·여 모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라는 공감을 놀이극으로 형성시킨다. <아홉소녀들>은 포스터에 들어나 있는 무표정한 소녀 얼굴, 심연과 내면이 파괴된 상처들을 역할놀이를 통해 보듬고 말 걸기를 시도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아이들이 실제 느끼고 있는 시선과 문제들이다. 주제의 담론들이 파편화되어 변주되는 에피소드 풍경들이 놀이극의 확장성으로 또렷하게 드러났다면 아홉소녀가 말하는 통증이 더 쓰리고 아프게 전달되었을 것이다. 변화 속도와 형식의 차이가 없는 놀이는 심연과 내면이 파괴된 소녀들의 상처와 시선들이 스쳐갈 뿐이다. 그러나 <아홉소녀들>를 통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와 사회현상들을 놀이연극으로 풀어가는 연출시선과 극단 프랑코포니의 작업들은 관객들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

▶극단 프랑코포니는 ‘불어권극단’을 의미하며 2001년부터 프랑스어권 희곡을 무대화 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20년간 한국 대표희곡을 불역해 프랑스에 소개하고 있는 임혜경(숙명여대 프랑스언어문화학과 교수) 대표는 불문학자로 극단의 연출을 맡고 있는 까띠 라뺑과 2009년 공연(고아뮤즈들)을 소개 한 뒤 정식 극단 이름을 가지면서 국내에 프랑스어권 현대극들을 공연하고 있다. 작품 기획은 ‘잘 한다 프로젝트’(조혜랑)가 맡았다. 의상은 박소영 디자이너가 제작했다. 아홉소녀들은 (권기대, 김시영, 한철훈, 김진곤, 김혜영, 허은, 이지현, 김신록, 홍철희) 등의 배우가 참여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