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고작 2년. 김정현(28)이 ‘배우’라는 이름으로 대중 앞에 선 지 그렇게 됐다. 아직은 신인이라는 수식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만한 기간이다. 하지만 그에게 설익음 같은 건 없다. 놀랍도록 빠르게, 그리고 가파르게 달려 올라가고 있는 그이니까.
데뷔작 ‘초인’(2016)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출신인 김정현은 탄탄한 실력을 바탕으로 곧바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질투의 화신’(SBS·2016) ‘역적: 백성을 훔친 도적’(MBC·2017)을 거쳐 ‘학교 2017’(KBS·2017)로 첫 지상파 주연을 꿰찼다.
올해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세계 최초의 4DX VR영화 ‘기억을 만나다’ 주연으로 나선 데 이어 좌충우돌 청춘 드라마 ‘으라차차 와이키키’(JTBC·이하 ‘와이키키’)에서 코믹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들 작품 속 모습엔 겹치는 지점이 있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도 빛바래지 않은 푸릇함 말이다.
‘기억을 만나다’에선 뮤지션을 꿈꾸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고민하는 우진을, ‘와이키키’에선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영화감독 지망생 동구를 연기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김정현은 “공감이 많이 됐다. 나 또한 꿈을 좇으며 불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2014년 여름이었어요. ‘초인’을 찍기 전이었는데, 굉장히 힘든 시기였죠. 하루에 열 몇 시간씩 알바를 하면서 우울증이 왔었어요. 하고 싶은 일(연기)을 못하고 있다는 상실감이 컸나 봐요. 그때의 저를 만날 수 있다면,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주며 응원해주고 싶어요. 그때 잘 견뎌 지금의 내가 있으니.”
-열렬히 배우를 꿈꿨던 그 시절을 한번 돌아볼까.
“그때는 현재를 사는 것 자체가 불안했어요. 기회도 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죠. 나는 할 수 있는데 나를 바라봐줄 사람이 없다는 강박이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생계를 위해 알바를 해야 했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괴리감이 있었으니까요. 둘 다 해내기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어요.”
-그런 고난의 고리를 끊어준 작품이 ‘초인’이었겠네.
“촬영에 들어갈 땐 그저 영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기뻤어요. 첫 장편이었는데,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준비했던 기억이 나요. 지금 돌아보면, ‘초인’으로 인해 영화제에 초청받게 됐고 기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잖아요. 많은 분들이 저라는 배우를 봐주시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요. 제 인생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죠.”
-그 시절 어느 정도로 고생을 했었기에?
“라면을 못 사먹을 때도 있었고, 카드 회사에서 빚 독촉 전화도 받아봤어요. 힘들었던 거야 말하자면 끝도 없죠. 어쨌든 그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거니까 항상 감사하면서 연기하고 있어요.”
-그러고 보니 작품 속에서 유독 고단한 청춘을 연기한 적이 많다.
“아마 제가 좀 불쌍해보여서 캐스팅하신 게 아닐까요? 하하. 다만 그 절실함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긴 했어요. 다른 이들만큼 저도 절실했던 적이 있으니까요. 운 좋게도 그런 에너지가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연기를 포기하고 싶었을 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건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일단 배우는 강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에 대한 확신이 강할수록 박탈감과 상실감도 커지더라고요. ‘난 자신이 있는데 왜 기회가 오지 않는 걸까’ 고민하고 좌절했다 다시 극복하는 과정을 반복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연기를 왜 이렇게 이상하게 했지’ 자책할 때가 많죠. 자신감은 갖고 있지만,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려는 편이에요.”
-지난해 거의 쉬지 않고 작품을 찍었다. 그런 변화를 본인도 실감하나.
“불과 몇 년 만에 주변 환경이 많이 변했죠. 제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게 됐고, 생활을 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작품을 연이어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해요. 굉장히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최근작 ‘으라차차’에 대한 시청자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
“그런 반응들 덕분에 더 열심히 촬영할 수 있었어요. 당초 계획보다 연장이 돼서 20부작까지 하게 됐는데, 힘들긴 했지만 재미있게들 봐주시니까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더라고요. ‘내가 잘해냈나’ 아쉬움도 남지만 후련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하죠.”
-다소 헐렁하고 유쾌한 동구 캐릭터도 꽤나 잘 어울리더라. 연기하는 입장으로선 어떤 캐릭터가 본인에게 좀 더 잘 맞는다고 생각하나.
“어느 정도 잘 맞고 안 맞는지를 정확히 따지기는 어렵네요. ‘나랑 꼭 맞는다’는 느낌은 없었었던 것 같아요. 다만 그 교집합이 저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역할을 경험해보면서 계속해서 배우고 습득해나가는 중입니다.”
-혹시나 연기해보고 싶단 욕심이 드는 캐릭터가 있다면.
“항상 그런 생각을 해봤었어요. 강렬한 역할이나 악역을 해보고 싶기도 했죠. 근데 요새는 그런 마음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런 생각 자체가 저를 가두는 일인 것 같아서요. 항상 새롭고 다양하게 도전해보고 싶은 욕구가 강해요. 대본에 쓰여 있는 걸 어떻게 표현해낼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지난해 ‘역적’으로 MBC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을 타기도 했는데.
“감사한 일이죠. 쉽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스스로를 다잡게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상이라는 건 그 의미만으로 충분 것 같아요. 괜히 으스댈 일은 아니잖아요. 받기 전이나 후나 (마음가짐은) 똑같아요. 쭉 정진해야죠.”
-자기 자신을 철저히 컨트롤하는 편인 것 같다.
“조심스러우니까요. 상 받았다고 들떠서 일희일비하는 건 싫어요. 그런 즉흥적인 감정을 되도록 경계하려는 편이에요. 충분히 기뻐하되, 행여 다른 이의 시선으로 봤을 때 오해를 사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란 생각이 들어요.”
-과거 인터뷰에서 ‘기억에 남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얘기를 했더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
“저는 한정적인 공간에 있잖아요. 근데 제 작품은 제가 없는 곳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죠. 제가 본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에게 웃음을 전달하기도, 슬픔을 달래주기도 하는 거예요. 그런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의 삶에 참여하게 된다는 게 참 귀한 일인 것 같아요.”
-멋진 생각이다. 듣고 보니 배우와 관객이 작품을 통해 만나는 일이 너무도 특별하게 느껴진다. 이런 생각은 언제부터 하게 됐나.
“처음 연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모르는 사람들끼리 작품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는 게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죠. 내가 연기한 결과물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칠 거란 생각을 하니 좀 더 고민하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배우,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