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그린 레이디버드의 형상은 소녀의 몸에 새 머리를 합성한 사진으로 표현되는 조금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어리석고 부족했던 시절을 회상이라도 하듯 영화는 10대 크리스틴의 모습을 짐짓 진지하게, 하지만 솔직하게 그려낸다. ‘프란시스 하’ ‘재키’ 등의 영화로 연출가보다 배우로 각별한 인상을 남긴 그레타 거윅 감독은 레이디버드라는 이름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름을 다시 정한다는 것은 창조적인 행위이자 종교적인 행위다. 자기 주체적인 행위이자 새로 이름을 지음으로써 진실한 정체성을 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진실을 찾게 해주는 거짓말 같은 거다.”
말하자면 스스로 명명한 레이디버드는 진실한 이름을 되찾는 통로가 될 거짓 이름이다. 영화는 무엇보다 ‘모녀 관계’를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서로 원하는 사랑의 의미가 다를 때 둘은 충돌한다. 사춘기 소녀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엄마도 어린 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호명되고, 각자 정의하는 사랑의 의미로 옆에 있어주기를 바란다. 엄마는 고등학생 딸이 어른처럼 행동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방을 잘 정리하고 바른 언어와 행실을 사용하길 바란다. 모녀는 방금 전 좋다가도 곧바로 의견이 엇갈린다. 엄마는 가족을 배려하지 않는 딸의 이기심을 비난한다. 문제 많은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딸은 엄마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기를 바란다. “누군가의 눈에 부족한 모습이 그 사람에겐 최선의 모습일 수 있다”고 항변한다.
성경에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새롭게 부름을 받는다. 특히 ‘발꿈치를 잡다’ ‘속이다’라는 뜻의 이름 야곱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다’라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이름을 부여 받는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곱이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과 함께 언급된다. 야곱의 삶이 있기에 이스라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레이디버드는 고향과 부모를 떠난 이후에야 진실한 자신의 이름을 되찾는다. 멀리 떨어진 대학에 진학한 레이디버드는 파티에서 만난 사람에게 처음으로 자신을 ‘크리스틴’으로 소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신을 믿니?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면서 신을 믿지 않다니.”
그녀는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뜻을 가진 ‘크리스틴’으로 자신을 호명한 후 다음날 교회에 나간다. 크리스틴이 병원 응급실에서 나와 교회를 찾아가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응급실에 실려간 크리스틴은 다음날 아침 황망하게 홀로 일어나 앉아 있다가 맞은편에 엄마와 함께 있는 한쪽 눈을 다친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걷는다. 오늘이 일요일임을 알게 되고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교회에 들어선다. 따스한 햇살이 드리운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뒷모습에 아름다운 성가대의 찬송이 들린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며 그녀는 고향집 부모에게 전화를 건다. “나에요, 크리스틴. 좋은 이름 주신 것 같아요”라고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렇게 그녀는 고향과 엄마의 사랑을 마음속에 품는다. 비로소 고향 새크라멘토의 풍경을 엄마와 같은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임세은<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