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집단이기주의’ 지적하는데…‘실버택배’ 홍보하다 역풍 맞은 정부

입력 2018-04-19 18:19 수정 2018-04-19 18:30


경기도 남양주 다산신도시 ‘택배 갈등’ 논란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정부는 노인들이 택배 짐을 가져다주는 ‘실버 택배’를 대안으로 제시하며 문제해결에 나섰지만 “집단이기주의를 세금으로 막으려 한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고 있다. 정부가 서둘러 사태를 봉합하려다 논란만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산신도시 택배 논란, 왜 불거졌나

다산신도시 택배 논란은 ‘지상에 차 없는 아파트’를 표방한 단지에서 차량 사고가 발생하면서 시작됐다. 아이가 다칠 뻔한 사고가 생긴 후 입주민들 사이에서 ‘안전’을 위해 택배 차량 운행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관리사무소가 택배회사에 이런 사실을 통보하자, 업체들이 아파트 입구에 배달 물품을 쌓아놓고 주민들이 찾아가게끔 하거나 아예 배송을 거부해 양측의 기싸움이 벌어졌다.

온라인에 올라온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안내문은 여론에 불을 질렀다. ‘택배차량 통제협조 안내’라는 제목의 안내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택배기사의 연락이 오면 ‘주차장에 주차 후 카트로 배달할 수 있는데 그걸 왜 제가 찾으러 가야하느냐. 그건 기사 업무 아니냐’고 하라. ②아파트 출입을 못하게 해서 택배기사가 반송하겠다고 하면 ‘택배기사를 위한 주차장이 있고, 카트로 배송하면 되는데 걸어서 배송하기 싫다는게 반송 사유가 되느냐’고 하라 등의 지침이 적혀있다.

안내문에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위해 지상에 차량 통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문구가 포함된 것도 논란거리가 됐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택배 기사를 상대로 한 갑질’ ‘집단이기주의’라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실버택배로 불똥 튄 택배 갈등

입주민들과 택배업체 간 갈등은 좁혀지지 않았다. 입주민들은 카트 배달이 어려우면 지하주차장을 출입할 수 있는 ‘저상차량’을 도입해달라고 택배업체 측에 요구했지만, 업체는 차량 개조비용 부담과 함께 기사들이 허리를 숙여 일을 해야하는 불편함 등을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사태가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정부가 나섰다. 국토교통부는 17일 김정렬 2차관 주재로 입주민 대표와 택배업체, 건설업계 관계자 등과 회의를 열고 단지 내 배송을 ‘실버 택배’로 해결한다는 데 합의했다.

실버 택배는 택배기사가 물품을 아파트 입구(실버 거점)로 가져오면 실버 택배 기사로 일하는 노인들이 집 앞까지 물품을 배달하는 방식을 말한다. 노인 일자리 창출방안의 하나로, 이번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 중 하나로도 꼽혀왔다. 정부와 지자체가 비용 절반을, 나머지 절반은 택배업체가 부담해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되레 ‘세금 특혜’라는 비판이 커졌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다산신도시 실버택배 비용은 입주민들의 관리비로 충당해야 한다’는 청원이 올라왔다. 글 작성자는 “입주민들이 택배원을 대상으로 갑질을 했는데, 실버택배 기사를 도입하고 관련 비용을 복지부와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입주자들이 택배차량 진입을 막은 것은 어떤 불가항력이 아니라 오로지 주민들의 이기심과 갑질로 인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청원에는 20만명 이상이 참여해 청와대가 조만간 답변을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구태의연한 대응 “실버택배, 특혜 아니다”

한 아파트 단지에서 발생한 택배 갈등은 왜 전국민적 논란으로 번졌을까. 이는 아파트 안내문 등을 통해 입주민들이 택배기사를 대상으로 ‘갑질’을 한다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사태 파악도 하지 않고 “실버 택배로 문제가 합의됐다”는 식의 발표를 한 게 여론을 더 악화시킨 측면이 있다.

국토부는 17일 ‘세금 특혜’ 논란에 대해 “실버택배는 기존 노인일자리 창출 사업을 다산신도시에도 적용하기로 합의한 것”이라며 “다산신도시 아파트에 특혜를 주기 위한 게 아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전국 88개 단지(2017년말 기준 실버택배 기사 2066명)에 적용하고 있다는 통계와 함께 “실버택배 비용 지원을 다산신도시 아파트에만 다르게 적용할 수는 없다”고도 했다. 기존 노인일자리 사업을 적용하는 것일 뿐 추가 재정을 투입하거나 특혜를 주는 게 아니라는 취지다.

복지부 역시 다르지 않았다. 복지부는 19일 보도설명자료에서 “실버택배는 노인일자리 창출을 위해 2007년부터 시행되는 사업”이라며 “정부가 최소한의 운영비를 지원하고 지자체가 실정에 맞게 시행하는 것으로, 노인들에게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소득이 높은 일자리”라고 했다.

하지만 “왜 전체 아파트에 실버 택배를 도입하지 않는 상황에서 갑질로 문제가 된 아파트에 세금을 지원하느냐”는 질문에 정부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한 청원자는 청와대 게시판에 “실버 택배를 통한 노인의 일자리 창출은 정말 필요한 곳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며 “일부 입주민의 집단이기주의로 발생한 일을 왜 국민의 혈세로 해결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

정부가 중재했던 실버 택배마저도 택배업체와 입주민이 비용 문제에 합의하지 못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국토부는 19일 ‘다산신도시 관련 최종 입장’을 통해 “택배사가 실버 택배 신청 철회를 정부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국민 여론을 겸허히 수용해 앞으로 아파트 단지 내 택배차량 통행을 거부하는 경우 자체적으로 해결방안을 찾는 것으로 정책방향을 정리하겠다”며 “실버 택배도 관계부처 협의를 통해 제도개선 필요성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