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58주년…독재정권에 맞선 용기와 희생의 역사

입력 2018-04-19 09:27
4.19혁명 당시 학생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1960년 4월19일 대한민국 전역에서 10만명 이상의 시민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해 거리에 나섰다. 3·15 부정선거에 항거한 이 날의 행동은 서슬 퍼런 독재정권에 맞선 용기와 희생으로 기록됐다.

4·19 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자유당 정권의 불법·부정 선거에 항거하며 시작됐다. 이날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많은 공무원이 이승만의 당선을 위하여 동원됐다. 또 내무부와 각 도의 경찰이 실질적인 선거본부가 되어 투표 총계를 조작했다.

야당 선거운동원들은 경찰의 탄압을 받았고 이승만을 지원하는 반공청년단의 폭력단원들은 선거 당일 시민들의 투표를 감시하기도 했다. 경찰은 공개적으로 자유당 후보를 지원했다. 또 선거 결과는 경찰지휘부와 내무부에 의해서 날조됐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총투표수에서 당선에 필요한 3분의 1보다 2배 이상 많은 표를 얻으면서 선거 전후 전국에 걸쳐 부정선거와 불법 선거를 규탄하는 반정부시위가 일어났다. 4월초 마산 시민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가담했다가 최루탄을 맞은 채 바닷속에 버려진 마산상업 고등학교 학생 김주열의 주검을 발견했다. 이를 계기로 시민들과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급격히 확산됐다.

4.19혁명 당시 학생들의 모습 (사진=뉴시스)

이승만은 4월 15일 마산에서의 시위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이에 4월 18일 서울·부산·대구·광주·인천·목포·청주 등 주요 도시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18일 서울에서만 자정까지 약 130명이 죽고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기 시작한 직후 전국 주요 도시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4월 19일 이후에도 시위가 이어지면서 일반 시민들도 가담했다. 반면 군대는 사태를 방관했다. 이틀 뒤 내각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장면 부통령은 이승만에게 대통령직에서 사임할 것을 촉구하면서 부통령직을 사퇴했다.

이승만은 자유당을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에서 떠나겠다고 말했고 앞으로 경찰을 포함한 정부관리들이 정치에 간섭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이승만의 즉각적인 사퇴를 요구했다. 4월 25일 각 대학 300여명의 교수가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하는 제자들을 지지하면서 서울 시내를 행진했다. 결국 이승만은 정·부통령의 재선거와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약속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해 유지됐던 정치 권력이 학생들이 주도하는 대중에게 굴복했음을 의미한다. 4·19혁명 후 경찰력의 마비에 따라 자유당이 하룻밤 사이에 붕괴함으로써 경찰력이 자유당의 주요골격을 이루어왔다는 점도 드러났다. 미국의 압력, 경찰력의 붕괴, 군으로부터의 지지 결여 등에 직면한 이승만은 1960년 4월 26일 사임을 발표했다.

신혜지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