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자 차원 업무 잘못 아닌 책임자로서 비위·범법 행위
국정원 사건은 이례적으로 실무급까지 30명 재판 넘겨 범죄 엄중·증거인멸 등 우려
국정 역사교과서 관련 교육부 TF 과잉대응 논란
국정 반대했던 외부 인사들 진상조사위 참여해 들쑤셔… 하위직까지 단죄 소문 흉흉
적폐청산을 국정과제 1호로 내건 문재인정부 출범 이래 검찰 수사력도 지난 정부 적폐청산에 집중돼 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규명이라는 큰 줄기 하에 각 부처와 기관이 경쟁적으로 자체 조사를 벌여 고발 또는 수사의뢰한 사건의 수사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당시 정부 주요 인사들이 대거 구속되거나 재판에 넘겨졌다. 그러나 기소된 이들 대부분은 김기춘 전 비서실장 같은 청와대 핵심 인사나 장차관 등 정무직 고위 공무원이었다. 형사처벌 근거 역시 정책 오류 등의 잘못이 아니라 책임지는 위치에서 저지른 비위나 범법 행위였다.
실무자·정책 오류≠형사처벌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정부부처의 적폐청산 작업이 공직자 사법처리를 목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배경에는 공직사회의 불필요한 위축에 대한 우려가 깔려 있다. 공직 사회 내에 전 정권 기조에 맞췄던 정책이나 하급 실무자까지 수사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불만이 팽배하다. 그러나 검찰이 실제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정부 정책 관련 실무 담당자를 사법처리한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난 6일 박 전 대통령 1심 선고로 1차 마무리된 국정농단 수사 과정에서 형사처벌된 청와대 인사는 김 전 비서실장과 우병우 전 민정수석, 조윤선·박준우·김재원·현기환 전 정무수석,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등을 꼽을 수 있다. 공무원 신분이지만 박 전 대통령을 직접 보좌하며 정권과 책임을 함께할 위치였던 이들이다. 이재만·정호성·안봉근 전 비서관 등의 경우 직급은 실무진이지만 소위 ‘문고리 3인방’으로 박 전 대통령의 범죄를 공유·공모한 탓에 처벌을 받게 됐다.
보건복지부와 문화체육관광부 등도 적폐 수사의 칼날을 맞았다. 그러나 처벌받은 이는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과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정관주 전 문체부 차관 등이었다. 기소된 혐의는 국민연금공단의 삼성 합병 개입,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등 애초 부처의 업무와 무관한 불법행위다.
정부부처의 자체 TF 조사를 통해 사법처리까지 이어진 대표적 사례는 해양수산부의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활동 방해 사건과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이다. 서울동부지검은 지난달 29일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조직적으로 방해한 혐의(직권남용 등)로 조 전 정무수석과 이병기 전 청와대 비서실장, 안 전 수석을 직권남용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이 사건에서도 해수부가 자체 감사 결과를 바탕으로 수사의뢰한 10여명 중 중간 간부들은 기소 대상에서 제외했다. 검찰 관계자는 “최종 책임자 위주로 처벌하는 게 기준”이라고 말했다.
국정원 사건은 이례적으로 실무자들까지 사법처리됐다. 서울중앙지검 국정원 수사팀은 지난해 8월 국정원 TF 수사의뢰를 받아 지난 2월까지 수사를 진행해 원세훈 전 원장 등 지휘부뿐 아니라 심리전단 팀장급까지 모두 30명을 재판에 넘겼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의 공작을 통해 국민에게 직접 영향을 미친 범죄의 중대성과 수사에 대한 저항 움직임, 증거인멸 우려가 큰 점이 고려된 것으로 전해졌다.
교육부 TF 수사의뢰 논란, 왜?
하지만 일부 정부부처가 적폐청산을 명분으로 수사 대상을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교육부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가 지난달 28일 박 전 대통령과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교육문화수석 및 교육부 장차관을 비롯해 전·현직 공무원, 민간인까지 25명 안팎을 대거 수사의뢰 대상에 올린 것은 많은 논란을 불렀다.
위원회는 교육부 실무급 공무원을 포함, 관료 10여명에 대한 신분상 조치(징계)도 함께 요구했다. 국정 역사 교과서에 반대했던 외부 인사들로 구성된 진상조사위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교육부 직원들로 꾸려진 진상조사팀은 가동 초기부터 ‘외부에서 들어와 완장질 한다’는 성토를 낳았다. 교육부의 사기는 바닥을 쳤고, 누구도 책임 있게 일을 하지 않자 내놓는 정책마다 혼선이 빚어진다는 내부 비판도 없지 않았다.
진상조사 보고서에 실무급 직원들까지 ‘부역자’로 기록되자 내부 분위기는 더 뒤숭숭해졌다. 익명을 요구한 하위직 직원은 “우리는 내려온 지시를 수행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하위직까지 적폐로 규정하고 단죄하면 앞으로 누가 어떻게 업무를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한 검찰 간부는 “국가기관에서 이뤄진 정책적 잘못을 공무원 개인에 대한 수사를 통해 청산하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고발·수사의뢰는 최대한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민영 기자, 세종=이도경 기자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