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한 신도시가 택배 문제로 시끄럽다. 이 신도시 아파트 대부분은 지상에 차 없는 단지를 표방하고 있는데, 택배 차량의 통행이 늘어나자 아이들 안전을 걱정한 입주민들이 차량 운행을 통제하면서 갈등이 표면화 됐다. 택배 기사들은 아파트 진입이 막히자 단지 입구 경비실에 물품을 맞기거나 일부는 배송을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품격과 가치를 위한’ 안내문
이 신도시 입주민들과 택배회사의 마찰은 입주가 한창인 지난달 본격화됐다. 입주민 커뮤니티나 단지 내에서 머물던 논란은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붙인 안내문이 알려지면서 온라인상으로 확대됐다. ‘우리 아파트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위하여’라고 시작하는 “택배차량 통제 협조 안내”라는 제목의 안내문은 네티즌들로부터 갑질이라는 비난을 샀다. 내용을 보면 단지 정문에 물품을 놓고 간다거나 반송하겠다는 택배기사에 대한 대응 방법이 제시돼 있다.
1. 택배사가 현재 정문으로 찾으러 오던지 놓고 간다고 전화/문자오면 이렇게 대응하세요.
“주차장에 주차 후 카트로 배달 가능한데 그걸 제가 왜 찾으러 가야하죠? 그건 기사님 업무 아닌가요??”
2. 아파트 출입 못하게 해서 반송하겠다고 하면 이렇게 대응하시기 바랍니다.
“택배기사님들 편의를 위해 지정된 주차장이 있고 카트로 배송하면 되는데 걸어서 배송하기 싫다고 반송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게 반송 사유가 되나요??”
이같은 내용의 안내문은 이 신도시 입주민 커뮤니티에서도 문제가 됐다. ‘관리소장이 X맨이다’ ‘갑질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는 의견과 “비용을 지불하고 제대로된 서비스를 받겠다는데 그걸 갑질이라고 할 수 있냐”는 항변이 이어졌다.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입주민들은 이 안내문으로 촉발된 갑질 논란에 대해 매우 불편해 했다. 택배회사와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 입주민들 “아이들 안전이 최우선”
거의 모든 입주민들은 아이들 안전을 위해 택배차량의 단지 내 운행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한 아파트 단지 내에서 택배 차량에 아이가 다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통행 제한’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 일부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택배회사에 통행 제한을 통보했고, 택배기사들은 아파트 한켠에 배달 물품을 쌓아놓고 주민들이 찾아가게끔 하고 있다. 일부 택배회사에서 배송거부를 선언했다는 전언도 있다. 양측의 기싸움이 실력행사로 이어지고 있는 모양새다.
이 문제는 지하주차장을 통해 택배 물품을 배달하면 간단히 풀릴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단지 내부로 통하는 지하주차장 높이가 낮아 택배 차량 진출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입주민들은 택배회사에 택배 차량을 지하주차장 출입이 가능한 저상 차량으로 바꿔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택배회사와 기사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기존 차량 높이를 낮추려면 개조해야 하는데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고, 차에 실을 수 있는 물량도 3분의 1가량 줄어들기 때문이다. 돈은 돈대로 들고 한 번에 배달할 수 있는 물품도 감소해 손해가 크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처음부터 택배 차량 통행을 제한한 것은 아니다. 입주민 카페 게시물을 보면 택배기사들에게 단지 내에서 천천히 운행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고 한다. 입주 초기 택배 물량이 크게 늘면서 차량 통행도 잦아져 아이들 안전에 위협이 됐기 때문에 통행을 제한게 됐다는 것이다. 안내문에서 밝힌 ‘아파트 품격과 가치를 위하여’와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이다.
◇ 택배기사들 “차량 개조 비용 들고 배송 물량 줄어 이중고”
입주민 카페에는 택배기사와 서로 윈윈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택배기사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저임금을 고려해 입주민들이 조금은 양보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갑질로 비춰지는 게 불편하다는 것이다.
전직 택배기사 출신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게시물에 댓글로 “신도시 초기 택배 물량의 대부분은 선반 커튼 공기청정기 등 부피가 큰 것들이어서 저상탑차로 운반하기는 어렵다”며 “단지 내 차량 통행을 막아 카트로 짐을 옮겨야 해서 밤 12시까지 일해야 했다”고 하소연했다.
택배 물품 1개를 배달하면 택배기사들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대략 700원 꼴이다. 수입은 배달하는 양에 비례하지만 부가가치세와 차량 운용비 등 경비를 제외하면 실제 손에 쥐는 건 절반 가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 입주민 택배기사 ‘윈윈’할 방법은 없나
이같은 택배기사들의 열악한 현실을 감안해 ‘공동 거점형 택배 시스템’ 도입이 거론되기도 했다. 택배사들이 아파트의 지정된 장소에 물품을 집결해 놓으면 아파트에 거주하는 노인 등이 가가호호 배달하는 시스템으로 현재 국내 일부 대단지 아파트에서 시행하고 있다.
‘공동 거점형 택배 시스템’을 도입한 대단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한 네티즌은 “한 달에 1000원 양보로 노인 복지도 되고 택배기사 노동력도 줄여주고 무엇보다 지상에 차가 없어 아이들이 마음 껏 뛰어놀 수 있게 됐다”며 “정답은 멀리 있는 것 같지 않다. 다같이 머리를 맞대면 답을 얻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방안 또한 비용 문제가 해결돼야 도입이 가능하다. 택배회사와 입주민들이 공동으로 단지 내 배송료을 부담해야 하는데 조율이 쉽지 않다. 택배 집하장에서 집 앞까지 배달하는 비용을 택배기사가 1개당 300원 가량 내는 곳도 있다. 이 때문에 공동 거점형 택배 시스템을 도입했다가 비용과 택배 분실 문제로 얼마 못가 중단한 사례도 있다.
정지용 기자 jyje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