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순교자는 1950년 6·25전쟁 발발 직후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순교자사업회)가 최근까지 파악한 순교자 247명 중 189명(76.5%)은 1950~1951년 공산당의 기독교인 탄압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때 발생한 순교자 중 제대로 자료가 정리되지 않았거나 미처 파악되지 않은 경우는 여전히 많다.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증언해줄 인물과 자료가 사라지거나 후손이 관심을 갖지 않아 잊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남 거창 출신의 박기천(1923~1950) 전도사는 6·25전쟁 직후 순교했으나 후대의 노력으로 기록이 잘 보존된 경우다. 박 전도사의 아들 박래영(71·부산 성도교회 원로) 목사는 세 살 때 부모를 잃었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도 증언과 기록을 꼼꼼히 모았다.
지난해 9월 아버지의 전기를 출간하고 이어 기념관 건립을 준비하고 있는 박 목사를 지난달 26일 부산 강서구 자택에서 만났다.
박 목사는 아버지 박 전도사를 가리켜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사람”(눅 9:62)이라고 평가했다. 박 전도사는 1950년 6·25전쟁 발발 전후로 여러 차례 살 기회가 있었으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사는 순간을 조금 늘리는 것보다 신앙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박 전도사는 학창 시절 명민한 학생이었다. 대덕심상소학교와 김해 복음농림학교를 모두 1등으로 졸업했다. 1948년에는 거창군청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거창군 위천면에서 산업계장으로 근무했다.
하지만 뇌물을 받고 불법을 눈감는 공무원들의 모습을 보며 번민하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공직을 내던지고 학창 시절 품은 뜻대로 목회자의 길을 택했다. 이후 그는 북상교회와 가천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다. 주일학교를 부흥시켰고 어린이 전도대를 만들어 복음전파에 매진했다.
그는 1950년 9월 인민군 치하에 들어간 거창 내무서에 소환 당한다. 인민위원을 선출하는 일요일에도 주일성수해야 한다고 설교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반동분자로 찍혀 구치소에 투옥됐다.
당시 내무서장은 주일에 일을 하면 교회로 돌려보내주겠다고 회유했지만 박 전도사는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한다며 거부했다. 결국 그는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9월 26일 경남 함양에서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총살당했다.
박 전도사의 시신은 6개월 뒤 학살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소나무 아래서 어깨에 총상을 입은 모습으로 발견됐다.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하는 자세였다.
박 목사는 1983년부터 34년 동안 박 전도사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지인·친척 40여명을 만나 취재했다. 카세트테이프로 녹음하거나 비디오로 촬영하면서 꼼꼼히 기록을 모았다. 노력은 지난해 9월 출간된 전기 ‘아버지의 길’로 결실을 맺었다.
박 목사는 지난해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고신총회에서 박기천 전도사 순교기념사업회를 만들고 기념관을 건립할 수 있도록 교단의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교단의 별도 지원은 없어 박 목사가 모금부터 건립까지 직접 발로 뛰어야 하는 상황이다.
박 목사는 또 “경남 지역 순교기념사업은 타 지역에 비해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라며 “경남지역의 최상림 남해교회 목사, 이현속 부봉교회 전도사 등 아직 조명 받지 못한 순교자들이 많다”고 했다.
실제로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사업회에 등록된 순례프로그램 안내 코스에는 서울 경기 충청 전라지역은 포함돼 있으나 경상지역은 빠져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순교기념관, 순교 유적지 등이 잘 보존돼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박 목사는 순교신앙의 전수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도 목숨을 아끼지 않은 박기천 전도사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 교회 세태에 큰 울림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후원문의: 010-3588-1225)
부산=글·사진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