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직시했다면 광주5·18 일어났을까”

입력 2018-04-03 05:00 수정 2018-04-03 05:00
1948년 5월 중산간지대로 피신한 제주사람들.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주로 보인다. 사진=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70년 전 제주도의 4월은 처절한 악몽의 계절이자 눈물어린 암흑의 계절이었다.

250여개 시민단체는 지난해 8월 공식 출범식을 가지고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를 꾸렸다. 전국적으로 제주4·3사건을 알리고 현재 국회에 제출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제주4·3특별법 개정안)' 논의를 촉구하기 위해서다.

70주년을 맞아 범국민위의 운영위원장을 맡은 박찬식 '육지사는 제주사름' 대표는 1일 뉴시스와 인터뷰에서 "제주 출신인데도 대학에서 4·3사건을 알게 됐다. 70주년인 지금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는 활동이 미진하다"며 "독일처럼 어두운 역사라도 정면으로 직시해야한다. 인권과 법치가 살아있는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이라고 밝혔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극장 8관에서 제주 4.3 범국민위원회 제70주년 기념사업 기자간담회가 진행되고 있다. 양윤호(왼쪽부터) 감독, 박찬식 4.3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현기영 소설가, 정연순 4.3 범국민위 공동상임대표, 류성 연극 연출가 2018.03.27. 사진=뉴시스

"대학 가서야 정확히 알게 된 제주4·3사건"

제주4·3사건은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제주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2003년)이다.

진상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 제주시에서 열렸던 3·1절 기념 대회에서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여 넘어졌고 이에 시민들이 항의하자 경찰이 총을 발사했다. 사건의 시작이었다. 미군정 경찰은 시위자 검거에 나서고 시민들이 맞섰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를 했다. 제주도민이 합세하며 탄압 중단과 함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그러나 진압이 심해지면서 같은 해 10월부터 본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그렇게 3만명이 희생됐다.

제주 서귀포시 출신인 박 운영위원장은 대학교에 들어가서야 제주4.3사건에 대해 제대호 알게 됐다. 그는 "어렸을 적 집안 어른들이 어렴풋이 말을 꺼내기도 했지만 공개적으로 얘기해주진 않았다. 물어봐도 답하지 않았다. 그 기억을 다시 말하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고 말했다.

1948년 11월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수용자들. 사진=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박 운영위원장은 1982년 서울로 와 대학에 입학, 학내 '제주도문제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갔다. 고향에서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제대로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되기 전까지 관심을 이어갔다.

1988년 6월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제주4.3사건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89년 처음으로 대중 추모행사가 열렸고 민간 연구단체인 '제주4·3연구소'도 설립됐다. 1993년에는 제주도의회에서 4·3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1995년 4·3 피해조사 제1차 보고서가 발간됐다. 1948년 이후 40여년이 지나서야 일어난 일들이었다.

박 운영위원장이 다시 제주4.3사건과 연을 맺은 것은 1998년이었다. 50주년을 맞아 제주도 일대에서 각종 세미나가 열렸다. 주변에서는 '50주년에는 돌파구를 열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다. 50주년 범국민위 특별위원장을 맡은 선배가 서울에 있던 박 운영위원장을 찾았다.

박 운영위원장은 "당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서 활동을 했다. 전국적 네트워크도 갖고 제주도 문제에 관심도 있으니 함께 이슈화해보자고 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4·3사건의 전국화'를 하자며 본격적인 제주4·3사건 진실 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나섰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에 제주4·3사건 특별법 제정은 힘을 받을 수 있었다. 5·16 '혁명'이 '쿠테타'가 됐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1997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다. 제주4·3사건을 공론화하고자 하던 의지와 시대적 상황이 맞아떨어진 시기였다.

박 운영위원장은 "결정적 계기는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에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를 발견했을 때"라고 했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불법 군사재판으로 수감된 이들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빼곡했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화로 제주4·3사건을 다룬 것도 제주4·3특별법 제정 여론을 높였다. 그리고 그해 말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000년 1월 11일 청와대에서 유족·시민단체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주4·3 특별법’에 서명하는 김대중 대통령. 사진=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진상조사보고서 나온지 15년…그러나 여전히 인식 낮아

진상조사 보고서가 나오고 특별법 제정도 됐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제주4·3사건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제주4·3평화재단이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제주를 제외한 전국 16개 시·도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국민 제주4·3사건 인식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1%가 4·3사건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시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28.3%뿐이었다. 관심도도 낮은 편이다. 8%가 '매우 많다'고 응답했고 15.4%만이 '어느정도 있다'고 답했다.

박 운영위원장은 "특별법 제정 이후 후속작업에 열중하느라 제주도 안에만 매몰돼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특별법 제정에 따라 진상조사위(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꾸려졌고 2003년 10월 보고서가 나왔다. 제주도 내 추모공원인 평화공원과 평화재단 설립, 기념관 건립, 유해발굴 사업들도 진행했다"면서 "하지만 활동이 주로 제주도에 한정돼 있었다. 전국적으로 국민들에게 제대로 알리는 활동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위령제 제단 위에 부착된 희생자 명단을 확인하는 유족들. 사진=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인권과 법치 살아있는 국가로 거듭나는 과정"

박 운영위원장은 "제주4·3사건은 어떤 나라가 되느냐의 문제"라며 국민들이 제주4·3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제주4·3사건은 인권과 법치라는 근대국가의 기본적인 원리와 가치를 부정했던 사건"이라며 "제주4·3사건을 돌아본다는 것은 대한민국이 인권과 법치가 살아있는 국가로 거듭나겠다고 하는 결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철저히 반성하면서 인권 선진국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어두운 역사를 정면으로 직시해야한다"고 강조했. 이어 "제주4·3사건을 제대로 직시했다면 이후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을까요"라고 반문했다.

최민우 기자 cmwoo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