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12> 어리리 성도

입력 2018-03-30 15:12 수정 2018-03-31 07:25
파독 간호사 어리리씨가 2013년 스페인 순례자의 길을 행군하고 있다.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 비행사처럼 낯설었다. 사막의 바람도 하늘도 공기도 그를 밀어냈다. 어리리(70)씨는 태어날 때부터 슬픈 영혼이었다. 그 날카로운 상념이 화살이 되어 뼛속을 후벼댔다. 출생은 그의 지독한 상실감을 예고했다.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징용에 끌려가지 않으려 자살을 시도한 후 마음에도 없던 어머니와 결혼했어요. 제가 두 살 때인 1950년 가족이 모두 남쪽으로 피난 왔어요. 위로 언니이고 제가 둘째 딸인데 아들이었으면 아버지가 그냥 어머니랑 살았을지도 몰라요.”

네 살 때, 할머니와 아버지가 강제로 어머니를 내쫓았다. 아들 못 낳은 게 여자 탓이라 했다. 어머니는 딸들을 가슴에 품었다. 매년 설이 되면 머리맡에 설빔이 놓여 있었다. 눈물 젖은 어머니의 흔적이었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죽었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그리웠죠. 학교에서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둥근달을 보며 어머니 얼굴을 그리곤 했답니다.”

아버지의 새 부인은 그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었다. 매일 쪽지를 전달했는데 그게 연애편지였다. 새엄마의 학대는 고통스러웠다. 아들을 낳고 더 심해졌다. 남동생을 키우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꽁꽁 언 개울물에서 동생의 기저귀를 빨았다. 토끼 80마리를 위해 먹이를 구하곤 했다. 토끼풀을 손으로 뜯다 보면 피가 났다.

더 큰 두려움은 무관심이었다. 일기장에 ‘내가 구덩이에 빠져도 누구 하나 건져줄 사람 없을 것’이라고 썼다. 당시 집을 떠나는 것만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여섯 살 때 천주교회에서 영세를 받았다. 성당에서 들리는 성가소리가 좋았다. 그때 알게 된 신부님께 외국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을 비쳤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편지만 남기고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이미 언니와 살던 터라 처음으로 세 모녀가 한자리에 모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엄습했다.

“언니의 결혼식 문제로 아버지를 다방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아버지는 매주 토요일 그 다방에 온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3년을 토요일마다 아버지를 보러 갔어요. 하지만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만나진 못했죠.”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딸이 오는 것을 알고 발길을 끊은 것이었다. 상실감이 밀려왔다. 그럼에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더해갔다.
어씨(오른쪽)가 1970년 초 독일 바이에른 가톨릭병원에서 한인 간호사 친구와 함께한 모습

“아버지는 센스가 있으셨죠. 외국에 나가 살 것을 미리 아셨는지 백합이라는 뜻의 리리(lily)로 제 이름을 지어주셨죠.”

아버지는 경찰서장과 미군부대 요직을 거쳤다. 다섯 가지 악기를 다루고 성악가 같은 목소리를 가진 분이었다. 아버지 재능은 그대로 그에게 이어졌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부님을 통해 독일 간호사로 갈 수 있었다. 독일 바이에른 가톨릭병원이었다. 1년을 실습하고 3년간 간호학교를 다닌 뒤 정식 간호사가 됐다.

“집을 떠났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지만 독일 삶도 쉽지 않았어요. 독일 간호사들이 모두 천사는 아니었지요. 무시당하니까 이를 악물었고요. 새벽까지 독일어 공부에 매달렸답니다.”

바이에른은 대부분 가톨릭병원이었다. 부활절과 성탄절은 축제였다. 평소 노래를 잘했던 그는 음악콘서트에 솔리스트였다. 한복을 입고 요들송을 부르고 텔레비전에도 출연했다.

2009년 시의원 출마 당시 홍보전단, 어씨의 사진과 프로필이 적혀 있다.

1988년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직원 9명을 채용해 의료 홈케어(Ambulant Pflegedienst)서비스를 했다. 퇴원 환자를 자신의 집에서 간호해주는 시스템이었다. 24시간 풀가동이기에 쉴 틈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길러져온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인함으로 버텼다. 2009년 자치구 선거(Kommunalwahl)에 기민당(CDU) 후보로 출마해 재독한인 1세대 최초로 독일 정치무대에 출사표를 던지기도 했다.

2013년 퇴직 후 아버지를 찾았다. 수소문 끝에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심지어 그의 딸이 보낸 정성스러운 편지도 다시 돌려보냈다. 가슴이 무너졌다.

그는 자신을 찾고자 스페인 순례자의 길에 나섰다. 4개월을 걷고 또 걸었다. 그가 사는 슈바츠발트에서 스페인까지 총 2700㎞ 거리였다.

“내가 걸어온 인생에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싶었어요. 나와 대화하고 싶었죠.”

어리리씨(왼쪽)가 1974년 독일인 남편 페터와 결혼사진을 찍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순례길에서 만난 의료봉사팀으로부터 피부암 진단을 받았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2015년엔 황혼의 마지막 시도로 6개월 동안 고국 땅 2400㎞를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권유로 한인교회를 가게 됐다. 처음엔 음대 유학생의 성가를 듣기 위해서였다. 십자가를 문득 올려다보았다. 그때 예수님이 마음속에 “이제 그만하거라”는 말씀을 들려주셨다.

“참 이상해요. 이전엔 십자가를 보면 싫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엔 마음이 뜨거워지고 주기도문을 외우면 한없이 눈물이 나요.”

그는 요즘 매주 성당이 아닌 교회에 간다. 고난주일에 특송을 하고 교인들을 위해 음식도 만든다. 기도를 잘하고 싶은 기도제목도 생겼다.

“70세 된 늙은이가 아직도 아버지가 그리워요. 아버지가 지금에라도 제 등을 한 번만 쓰다듬어준다면 상처가 아물 것 같아요. 하지만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하나님이 제 영적 아버지시잖아요.” 그는 이미 창조주 하나님이 참아버지임을 깨닫고 있는 듯했다.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