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성폭력 피해를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단역배우 자매 사건’에 대해 경찰이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이 사건은 ‘미투(Me Too·나도 말한다)’ 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재수사를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하는 등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3월 3일 등록된 청원은 29일 오후 4시 기준으로 21만3466명이 동참했다.
경찰청은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의 사실관계 등을 확인하기 위해 진상조사 전담팀(TF)을 구성했다고 29일 밝혔다. 경찰청 관계자는 "본청 성폭력대책과가 주축이 돼 감찰, 수사과 소속 경찰과 청내 변호사 등 20여명으로 전담팀을 꾸려 28일부터 본격 조사에 나섰다"고 말했다.
전담팀은 해당 사건에 대한 사실관계를 재확인하는 한편 당시 수사 과정에서 부적절한 처리나 문제점이 없었는지 등을 들여다볼 계획이다. 당시 경찰은 두 자매 중 언니인 A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해자를 격리하지 않은 채 피해 상황을 자세히 묘사할 것을 요구했고 A씨는 수사 중에도 가해자들의 협박에 지속되자 결국 고소를 취하했다.
전담팀은 당시 경찰 수사기록과 사건 관련 자료를 수집해 기초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을 마치는 대로 위법성 여부에 따라 수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당시 사건을 담당한 경찰관 3명 중 현직에 남아 있는 2명에 대해 직접 조사할 계획이다. 피해자 측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사망한 상태여서 두 자매의 어머니를 대신 조사할 계획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위법성이 드러나면 수사를 검토하겠지만 오래 전 발생한 사건이라 공소시효가 만료됐고 당시 피해자 측이 고소를 취소했기 때문에 재조사를 하더라도 처벌 가능성은 단언할 수 없다"며 "진상조사를 통해 수사 과정의 문제점이나 개선점도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전담팀은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 제도 개선책 등을 마련하고 피해자 유족을 위한 조치 등을 검토한다.
이 사건은 2004년 7월 동생 B씨의 소개로 드라마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언니 A씨가 경남 하동의 촬영장에서 기획사 보조반장에게 성추행을 당하며 시작됐다. 보조반장은 이후 현장의 다른 관계자에게 추행 사실을 알렸고, A씨는 약 3개월간 관계자 총 12명에게 성폭행과 강제 추행을 당했다.
A씨는 성폭행 피해를 당한 뒤 제대로 된 피해구제를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A씨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경찰 수사에 더 큰 고통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단역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던 동생도 죄책감에 “엄마, 복수하고 20년 뒤 만나자”라는 유서를 남긴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피해자 아버지 역시 두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건 당시 경찰은 성폭행 등이 피해자가 직접 고소해야 하는 친고죄이며, 이미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에 현행 법 체계에서는 재수사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경찰은 26일 청와대 청원 서명 인원이 20만명을 넘어서자 본격적으로 재수사 검토에 나섰다. 이날 이철성 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재수사가 쉽지 않아 보이지만 법률적으로 처벌이 가능한지 검토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최민우 기자 cmwoo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