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해 다시 한 번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말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미국이 추구하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 폐기(CVID)’와는 다른 의미라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평가다.
김 위원장은 지난 26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선대의 유훈(遺訓)’을 거론하며 “현재 한반도 정세가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며 “김일성 및 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주력하는 것은 우리의 시종일관된 입장”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일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사단을 만난 자리에서도 ‘선대의 유훈’과 ‘한반도 비핵화’ 발언을 했다. 시 주석 역시 ‘한반도 비핵화’가 중국의 입장임을 재확인했다.
김 위원장의 ‘선대의 유훈’ 언급은 ‘북한의 비핵화 조건이 과거와 다르지 않다’는 의미로 읽힌다.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주장을 계속해 왔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압박 조치가 해제돼야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논리로 이어지게 된다. 김 위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도 “우리는 지난해 그 무엇으로도 되돌릴 수 없는 강력하고 믿음직한 전쟁 억제력을 보유하게 됐다”며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다.
때문에 북한이 생각하는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과 미국이 모두 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없애는 비핵화다. 북한의 핵무기를 없애려면 미국의 ‘핵 타격수단’ 한반도 전개 중단, 주한미군 철수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향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에서 이러한 주장을 펼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기존 대북 제재 해제는 물론 더욱 큰 보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북한은 핵실험·미사일발사 중단과 한·미 연합 군사훈련 중단을 동시에 진행할 것을 주장해 온 중국의 힘을 빌려 비핵화 보상 규모를 키우려 할 수도 있다. 북한과 한·미 간 비핵화 협상은 접점 찾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미국 내 북한 담당자들과 전문가들도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라는 단어에 상당한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미국에 방북 성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일부 미국 관리들이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를 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의 핵·미사일 고도화 중단뿐 아니라 기존의 핵무기 폐기를 단기간에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대북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진 미국 정부가 북한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일 가능성도 떨어진다.
미국은 핵 포기를 담보로 경제적 보상만 챙긴 후 일방적으로 협상파기를 선언했던 북한의 과거 전략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듭 내비치고 있다. 비핵화 협상이 중국 대 미국 간 대리전으로 흐르면서 장기화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28일 “‘단계적 조치’를 주장하며 한 번에 비핵화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펴는 북한과 가급적 빠른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미국 간 간극이 가장 큰 쟁점”이라고 말했다. 오준 전 유엔대사는 “북한이 향후 협상에서 분명한 비핵화 의지와 진정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