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수치심, 가해자가 느껴야”… 美·佛 여성작가 ‘미투’를 말하다

입력 2018-03-27 07:49

“성폭행당한 사실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글로 쓰는 게 부끄럽지 않으셨나요.”

무례한 질문이지만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고발한 사람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자신의 성폭행 피해 경험을 토대로 소설 ‘다크 챕터’를 쓴 대만계 미국인 작가 위니 리(왼쪽 사진)도 다르지 않았다. 리는 어떤 대답을 내놨을까.

‘다크 챕터’ 출간을 기념해 방한한 리는 26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성폭행 피해자들에게 강요되는 ‘수치심’은 피해자들을 침묵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감정”이라며 “잘못한 게 없는 피해자는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수치심은 가해자의 몫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전가해 왔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몸을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생각한 가해자입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누가’ 느껴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잘못된 사회가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해 온 것이기도 해요.”

리는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던 중 2008년 북아일랜드에서 하이킹을 하다 15세 소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 경험은 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우울증으로 일을 하지 못했고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였다. 하지만 글을 쓰고, 다른 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친구들의 지지를 받으며 회복할 수 있었다.

리는 성폭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합의에 관한 논쟁’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평등한 관계에선 ‘노(No)’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위계가 있는 상황에서는 어려워요. 가해자는 적극적인 거부 의사를 못 들었으니 합의에 의한 관계라고 생각할지 모르죠. 하지만 피해자의 행동이나 분위기로도 거부 의사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해요. 그런 감수성은 교육을 통해서만 길러질 겁니다.”

리는 성폭행의 본질이 ‘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리를 성폭행한 가해자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였다. 그는 가해자의 심리를 분석해 ‘다크 챕터’에 가해자의 입장도 담았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했을 뿐 아니라 가해자의 상처까지 끌어안았다.

리는 계속 희망을 말한다. 희망의 근거는 ‘연대’에 있다. 리는 SNS를 주목하고 있다. 리는 “피해자라는 점과 점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기회가 SNS에 펼쳐져 있다. 목소리들이 계속 더해지면 하나의 파워로 커질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데는 SNS의 힘이 컸다.

이란계 프랑스인 소설가 마리암 마지디(사진 오른쪽)도 같은 날 서울 중구 주한프랑스문화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미투 운동의 연대에 대해 말했다. 소설 ‘나의 페르시아 수업’으로 2017년 프랑스 공쿠르 신인상을 수상한 마지디는 “여성들은 탄압받지 않도록 평생 노력해야 하고 함께 행동해야 한다. 연대와 지지가 성폭력 피해를 줄이고 피해자들을 돕는 길”이라고 말했다. 마지디는 이슬람 혁명 이후 여성 인권이 급락한 이란의 여성 문제를 다루는 소설을 준비 중이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