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겨울 추위가 물러가고 따스한 봄기운이 대기를 채웠다. 배우 오연서(31)에게는 이런 계절의 변화가 더욱 절실히 느껴질 것 같다. “춥고 춥고 추웠던 겨울”에 드라마 ‘화유기’(tvN) 촬영을 누빈 그는 봄의 시작과 함께 싱그러운 로맨스 영화 ‘치즈인더트랩’(감독 김제영·이하 ‘치인트’)으로 스크린을 두드렸다.
“여태껏 제가 연기해온 캐릭터들은 전부 강단이 있어요. ‘왔다! 장보리’(MBC·2014)의 보리, ‘돌아와요 아저씨’(SBS·2016)의 홍난, ‘화유기’의 선미, 그리고 ‘치인트’의 설이까지. 제가 워낙 잘 흔들리는 성격이어서 뚝심 있게 ‘잘 서있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저 또한 단단해지고 싶다는 바람이 투영된 게 아닌가 싶어요.”
‘치인트’의 홍설은 자기감정에 솔직한 주체적인 성격의 여대생. 베일에 싸인 교내 킹카 유정(박해진)과 연애하면서도 결코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외모뿐 아니라 꾸밈없는 투명함이 실제 그와 꽤나 닮았다. “매 작품마다 캐릭터와 사랑에 빠진다”는 오연서를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관객의 입장에서 ‘치인트’를 관람한 소감은 어땠나.
“새로운 영화 한 편을 재미있게 봤다는 생각이 들어요. 풋풋하고 설레고 따뜻했어요. 어떤 작품을 해도 늘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래도 따뜻한 봄과 여름이 생각나는 영화였던 것 같아요.”
-어느 지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는지.
“시간이 모자라서 편집된 분량이 많아요. 원작 웹툰 내용이 워낙 방대했으니까요. ‘설이의 감정을 좀 더 디테일하게 보여줬더라면 캐릭터 표현에 좀 더 도움이 됐을 텐데’ 하는 정도의 안타까움이랄까. 아마 모든 배우들이 가지는 섭섭함이 아닐까 싶어요.”
-이미 드라마로 선보여졌던 작품이다. 부담이 컸을 텐데, 그럼에도 출연을 결정한 이유는.
“영화를 하고 싶던 차에 제안이 들어왔어요. 당연히 부담감은 있었죠. 워낙 원작의 인기가 높았고 드라마도 사랑받았으니까요. 그럼에도 홍설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는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그간 경험했던 캐릭터들과 결이 다르다는 점에서도 욕심이 났고요.”
-‘치인트’ 예상 캐스팅에서 매번 1순위로 꼽혔는데.
“그래서 외모 싱크로율을 최대한 맞추려고 노력했어요. 일단 메이크업은 색조를 거의 쓰지 않고, 의상은 청바지에 티 하나 입었죠. 현장에서도 (홍설과)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대학생 역할이라 부담스러웠지만 ‘예쁘게 찍어주겠다’는 감독님 말을 믿었죠. 다행히도 뽀얗게 잘 나왔더라고요(웃음).”
-만화 마니아여서 웹툰은 진작 읽었다고 들었는데 드라마 ‘치인트’도 봤나.
“아니요. 다른 드라마 촬영 중일 때라 못 봤어요. 막상 영화 촬영에 들어가니까 오히려 더 못 보겠더라고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제 안에 다른 생각이 들까봐서요. 시각적 잔상은 오래 남잖아요. 이제 영화가 끝났으니, 드라마를 즐기는 애청자 입장으로 보려고요.”
-최근 ‘화유기’ 촬영을 끝마쳤다. 유난히 고생스러운 현장이었을 듯한데.
“올해 겨울은 정말 춥고 춥고 추워서…. 추위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 판타지 장르이다 보니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본 것 같아요. CG를 고려한 카메라 테크닉 등에 대해 배웠어요. 허공에 대고 연기하는 건 힘들었지만(웃음). 반대로 신선한 부분도 있었어요. 극 중 다양하게 변신을 했거든요. 조선에도 갔다가 경성에도 갔다가. 한 작품에서 이렇게 많은 경험을 해보다니, 재미있었어요.”
-초반 분위기는 다소 무거웠을 것 같다. 스태프 부상, 초유의 방송사고 등 여러 악재가 겹쳤으니.
“다들 안타까워했어요. 하지만 계속 쳐져있을 순 없으니 서로 으쌰으쌰해가며 열심히 찍었죠. 이후에는 별 탈 없이 마무리됐고, 끝까지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스태프 분들이 고생을 너무 많이 하셨어요. 부디 올해 겨울은 덜 추워서 많은 분들이 덜 고생하셨으면 좋겠어요.”
-상대배우 이승기와의 호흡이 꽤 좋아보였는데.
“저희 커플이 많은 사랑을 받아서 너무 기분 좋아요. (실제로는) 아직 서로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 쓰고 있어요. 제가 87년생, 승기씨가 빠른 87년생이어서(웃음). 현장에서 배려를 정말 많이 해주셨어요. 제대하자마자 드라마를 찍어서 정말 바쁘셨을 텐데 늘 넘치는 에너지로 분위기를 이끌어주셨죠.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네요.”
-‘치인트’에서 오랜만에 대학생활을 경험해봤는데, 혹시 그때로 되돌아가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공부를 열심히 해보고 싶어요. 장학금 받아서 삶에 보탬이 돼보고 싶기도 하고(웃음). 대학 캠퍼스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더라고요. 학생들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저때로 돌아가고 싶다’ ‘봄처럼 참 싱그럽다’ 생각했죠. 근데 저는 20대보다 30대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20대는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지만 늘 부족한 상태잖아요.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고민하고 힘들어하던 시기였죠. 여러 문제에 부딪혀 ‘연기를 계속해야 하나’ 낙담하기도 했어요. ‘무명’이라 할 수 있었던 시간 동안 제 미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죠. 서른이 되고 나선 한결 여유가 생겼어요. 좀 더 편안해진 것 같아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명확해졌으니까.”
-힘들었던 그 시기는 어떻게 견뎌냈는지.
“학교생활이 큰 도움이 됐어요. 연기하는 친구들끼리 고민을 나누며 꿈을 키웠죠. 계속해서 마인드컨트롤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내 인생에 대해 가장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도 힘들어하고 있을 모든 20대들이 힘을 냈으면 좋겠어요.”
-그 시절 꿈꿨던 배우로서의 청사진이 있다면.
“그때 상상했던 것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땐 그저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 배우로서는 꿈꿔왔던 대로 잘 가고 있는 거 같아요. 인간으로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근데 행복의 기준을 찾는 게 어려워요. 그걸 찾고 있는 과정인 것 같아요.”
-영화 홍보까지 끝마치면 간만에 휴식이 주어지겠다.
“일단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려고요. 그래야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다가도 욕심나는 작품이 있으면 하게 되겠죠(웃음).”
-쉴 때는 어떤 생활을 하는 편인가.
“가끔 피부과에 가거나 인터넷 쇼핑하는 정도? 추울 때 돌아다니는 거 안 좋아해요(웃음). 날씨 따뜻해지면 운동을 시작해보려고요. 이제는 촬영 후반부쯤 체력의 부침을 느껴서요. 보고 싶었던 드라마들도 몰아서 볼 생각이에요. 애니메이션도 너무 좋아해요. 보고만 있어도 힐링되는 느낌이거든요. 이제 저만의 세계로 돌아가야죠. 하하.”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