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매우 비열한 동네일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까지 그런 모습에 동참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향 텍사스주로 떠나는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의 말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22일(현지시간) 미국 국무부 로비에 마련된 퇴임식 연단에서였다. 방금까지 상관으로 모시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관해선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퇴임자로서는 이례적이었다. 해외순방 중이던 자신을 공식 절차도 아닌 트위터로 ‘굴욕’ 해임시킨 데 따른 불만의 표시였다.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이래 백악관과 미 행정부에는 인사 피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고위직 다수가 굴욕 끝에 일방적으로 내쫓기는가 하면 폭주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맞서다 자진사임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틸러슨에 이어 이날 추가로 경질된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합치면 트럼프 행정부 들어 쫓겨난 미 정부 주요 인사가 27명에 달한다고 전했다.
NYT에 따르면 27명 중 사실상 강제 퇴출당한 인사는 18명이다. 앞서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전 국장과 앤드루 매케이브 전 부국장이 모두 일방적으로 해임됐다. 최측근으로 꼽혔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 역시 칼날을 피하지 못했다. 맥매스터의 전임자 마이클 플린도, 트럼프 백악관 초대 비서실장 라인스 프리버스도 보기 좋은 이별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중에서도 틸러슨과 맥매스터는 이른바 ‘트위터 인사’로 수모를 당한 사례다. 지난 13일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마이크 폼페이오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신임 국무장관”이라고 적어 틸러슨의 해임을 공식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2일에도 트위터로 맥매스터의 해임을 발표했다.
6일 사임한 게리 콘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맞서다 자진해 물러난 경우다. 콘 위원장은 동맹국 관세 조치에 맞서 24시간 대통령을 설득하면서 배수진을 쳤지만 결국 자진 사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을 위협했던 인사에게는 더한 굴욕을 안겨줬다. 매케이브 전 FBI 부국장은 공식퇴임 이틀 전이던 16일 해임돼 연금조차 받을 수 없는 신세가 됐다.
부적절한 행실로 물러난 사례도 많았다. 호프 힉스 전 공보국장은 러시아 특검 관련 하원 정보위 비공개 청문회에서 ‘대통령에게 선의의 거짓말은 한다’고 발언해 논란에 휩싸인 끝에 지난달 28일 자진 사임했다. 롭 포터 전 선임비서관은 전처 2명을 폭행했다는 보도 뒤 백악관을 나갔다. 데이비드 소렌슨 전 연설비서관도 전처를 폭행했다는 의혹으로 쫓겨났다. 앤서니 스카라무치 전 공보국장은 임명 10일 만에 내쫓기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들의 빈자리에는 방송에서 유명세를 얻은 ‘TV 유명인사’들이 유독 많이 등용됐다. 맥매스터의 후임으로 임명된 존 볼턴 전 유엔대사는 2007년부터 보수매체 폭스뉴스에서 평론가로 일했다. 폭스뉴스에 주로 출연해 뮬러 특검을 비난한 조지프 디제노바 전 연방검사는 트럼프 대통령 변호팀에 등용됐다.
폭스뉴스 간판 앵커 출신인 헤더 노어트 국무부 대변인은 최근 틸러슨 경질에 반발하다 해임된 스티브 골드스타인을 대신해 국무부 차관대행 보직을 얻었다. 게리 콘의 뒤를 이어 NEC 위원장 자리에 앉는 래리 커들로 CNBC 해설자도 TV로 뜬 유명인이다. 이에 하루 4∼8시간씩 TV를 시청하기로 유명한 트럼프 대통령의 취향이 반영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