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안아도 되나요”… 타인 존중 배우는 ‘미투세대’

입력 2018-03-23 07:01

경기도 성남 한성어린이집에서 최근 색다른 성교육이 진행됐다. 얼굴 팔 배 등 몸 곳곳에 동그란 모양의 원색 스티커를 붙인 아이 20명이 옹기종기 모여 강사의 말을 경청했다.

“친구 몸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강사의 질문에 “먼저 물어봐야 돼요”라는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신호가 떨어지자 여기저기서 스티커 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친구에게 거절당한 아이가 “너는 내 거 뗐잖아”라며 불만을 터뜨리는 소동도 빚어졌다. ‘동의 없이 남의 몸을 만지지 않는다’는 게임 규칙은 아무도 어기지 않았다.

이곳 교사 신정은(30)씨가 들려준 이야기다. 스티커 떼기 놀이는 신종 성교육 게임으로 타인의 신체를 존중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게 해준다. ‘낯선 아저씨를 경계하라’고만 가르쳤던 과거의 성교육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신씨는 “성교육을 자체적으로 하다가 이번에 여러모로 필요성을 느껴 처음으로 외부업체의 도움을 받았다”며 “바로 다음날부터 아이들이 ‘선생님 안아도 돼요’라고 물어보고 안더라. 어른들도 많이 배웠다”고 했다.

두 달째 이어지고 있는 ‘미투(#MeToo)’ 운동이 성교육 현장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오고 있다. 최근 학부모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성교육 프로그램들은 “싫어요” “안돼요”라고 외치는 것만 강조하는 피해예방 교육 대신 상대방의 신체를 존중하는 것에 초점을 둔 가해예방 교육이다.

학부모들은 “내 자녀에겐 우리 세대의 그릇된 성 인식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며 셀프 성교육에도 나섰다. 고등학생 아들을 키우는 정모(47)씨는 미투 이후 집에서 새로운 규칙을 세웠다. 저녁 식사는 거실에서 TV 뉴스를 보며 한다. 미투 관련 뉴스가 나오면 아들에게 넌지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본다. “저런 행동은 뉴스에 나올 만큼 큰 잘못”이라고도 일러준다. 이달 초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김지은씨의 인터뷰를 보면서는 아들이 먼저 “저 사람(안희정) 정말 잘못했네”라고 말을 꺼냈다.

정씨가 팔을 걷고 나선 건 그 또한 잘못된 성교육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정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옆 반 교사에게 성추행 당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끙끙 앓기만 했다”며 “우리 자녀 세대에선 성폭력 가해자도, 피해자도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성교육 수요가 늘면서 강의 신설 움직임도 잇따르고 있다. 서울 영등포구 심리치료센터 ‘향기나무’는 다음 달부터 초등학교 4∼6학년을 대상으로 별도의 성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한다. 최근 들어 학부모들의 문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최문정 향기나무 대표는 “엄마들도 제대로 성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여서 전문 교육을 찾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교육 도서 판매량도 증가했다. 교보문고는 지난 1월 1일부터 지난 20일까지 유아·아동·가정생활 분야 성교육 도서가 2만9750권 팔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0.5% 늘었다고 밝혔다. 알라딘도 서지현 검사가 방송에 처음 출연한 지난 1월 29일부터 지난 21일까지 유아 성교육 도서 판매량이 직전 같은 기간 대비 1.8배 늘었다.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를 펴낸 김서화 작가는 “미투는 본질적으로 성차별적 인식을 깨뜨리려는 운동이다. 미투 이후 세대는 성 평등에서 훨씬 더 진보한 세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재연 방극렬 기자 jay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