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언론들이 국가두마(하원) 의원이 여기자들을 대상으로 성추행한 것과 관련해 취재 거부에 나섰다.
22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은 라디오 방송국인 모스코에코와 RBC 미디어 그룹, 민간 독립 TV방송 도즈드 등 주요 언론들이 레오니드 슬러츠키 외교위원장의 성추행 및 국가두마 윤리위원회의 무혐의 결정에 반발하며 더이상 국가두마 취재를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앞서 영국 BBC방송 러시아 지국 소속 파리다 루스타모바를 비롯해 러시아 여기자 4명은 슬러츠키 위원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발했다. 또 마리아 자카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역시 슬러츠키 위원장에게 수년전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50세의 슬러츠키 위원장은 극우 경향의 러시아 자유민주당 소속이다. 그는 자신에게 제기된 성추행 의혹들을 모두 중상모략이라고 반박하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파문이 확산되자 페이스북에 “고의든 아니든 간에 고통을 준 여러분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믿어달라. 해를 끼칠 의도는 없었다”고 밝혔다.
국가두마 윤리위원회는 21일 슬러츠키 위원장의 행동 중 윤리 규범을 위반하는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오히려 문제를 제기한 언론사들이 대선을 앞두고 보도한 것이 수상하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리위원회 청문회에서 유출된 녹음에 따르면 한 의원은 “이 문제를 제기한 언론사는 정치적이다” “문제 제기 여기자들은 서구에서 명령을 받았다”고 망발을 하기까지 했다.
이에 분노한 러시아 언론은 “언론인들은 안전과 존엄성에 대한 헌법적 권리가 있다”며 국가두마에 대한 취재를 보이콧하겠다고 나섰다. 특히 슬러츠키 위원장에 대해서는 성범죄 외의 것은 보도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AFP통신은 “러시아에서는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미투 운동이 여전히 금기시되는 주제”라면서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는 러시아에서 이러한 보이콧 캠페인이 일어난다는 것이 굉장히 특수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마초 문화’가 만연한 러시아에서는 성추행에 대해 문제를 호소하기 어려운 분위기인데다 호소해도 처벌할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심지어 성폭행조차 재판까지 가는 일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언론 코메르산트는 이번 보이콧 사건을 보도하며 남성적인 이미지에 자부심을 가진 푸틴 대통령이 2006년 모셰 카차브 이스라엘 대통령을 언급하며 “정말 대단한 남자다! 여자 10명을 강간하지 않았는가. 정말 부럽다”며 체력을 칭찬했다고도 전했다. 카차브 대통령은 대통령 재직중 여직원 성추행 및 성폭력 혐의가 드러나 임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사직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