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환자 ‘SOS' 포착… 자살 막는 동네의사

입력 2018-03-20 08:57

서울 강북구 번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손녀와 단둘이 사는 이모(72·여)씨는 강북구 보건소 자살예방팀이 상담·관리하고 있는 ‘자살 위기자’다. 이씨는 10년 전 허리 수술을 받은 뒤 장애 5급 판정을 받아 거동이 불편하다. 마땅한 벌이가 없는 데다 이혼한 아들 대신 손녀까지 키우고 있어 생활고도 적지 않다. 2년 전 남편과 사별한 뒤부터 우울증을 앓아 왔고 불면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이씨는 인근에서 번동종로약국을 운영하는 김광숙 약사의 눈에 띄었다. 김 약사는 강북구 보건소가 보건복지부 지원을 받아 7월부터 시범사업을 시작한 ‘의료기관, 약국과 함께하는 마음건강증진사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단골 의사·약사가 주민 마음건강 체크

이는 동네 병·의원이나 약국, 한의원을 찾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우울증 선별 검사(1단계)와 자살 위험성 평가(2단계)를 수행하고 위험군으로 분류되면 전문가의 위기개입을 의뢰하는 사업이다. 동네 사정에 밝은 김 약사는 이씨의 형편과 건강상태도 훤히 꿰고 있었다. 어느 날 불편한 몸으로 약국에 온 그에게 한국판 노인우울 척도 설문지(GDS-15)를 내밀며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평소 의욕이 많이 떨어졌습니까’ ‘헛되이 살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절망적이라는 느낌이 자주 드십니까’ 등 모두 15개 항목의 질문을 던졌고 그는 ‘예’(1점) 혹은 ‘아니요’(0점)로 답했다. 이씨의 우울증 점수는 14점으로 높게 나왔다. 10점 이상이면 우울증 양성자로 분류돼 2차 자살 위험성 평가 대상이 된다.

김 약사는 보건소가 제공한 자살 위험성 평가지에 따라 이씨에게 지난 한 달간 죽음 혹은 자살 생각을 했는지, 실제 자살 계획을 세웠거나 시도한 적이 있는지 등을 물었다. 이씨는 중위험 자살 위기자로 평가돼 보건소 사례관리 대상으로 의뢰됐다. 자살예방 전문요원이 집으로 찾아와 한 차례 대면 상담했고 이후 전화 상담이 이뤄지고 있다.

지난 13일 기자가 번동종로약국을 찾았을 때도 김 약사는 주민 시모(72)씨를 상대로 우울증 선별검사를 하고 있었다. 3년 전까지 택시운전을 했다는 시씨는 지금은 그만두고 소일하고 있다고 했다. 시씨의 우울증 점수는 2점으로 낮아 지속적 모니터링 대상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김 약사는 “번거로운 일이지만 의미 있다고 생각해 시범사업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임대아파트가 많은 동네여서 독거노인이나 만성질환자 등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명절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몇 번 봤다고 한다. 이 지역은 강북구 내에서도 자살률이 높은 축에 속한다. 김 약사는 “주민들한테 우울증이나 죽음, 자살 얘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지만 외롭고 상처가 많은 어르신의 경우 의외로 속내를 잘 털어놓는다”고 했다.

김 약사는 지난해 7∼11월 5개월간 진행된 시범사업을 통해 모두 82명을 검사해 우울증 양성자 20명을 발굴하는 개가를 올렸다. 자살 위기 개입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8명은 보건소로 연결해줬다.

서울 강북구의 자살 위기자 조기검진 사업에 참여 중인 미아동 삼양제일내과의원 이미희 방사선사가 지난 13일 70대 주민을 대상으로 1차 우울증 선별검사를 하고 있는 모습.

암 발견 못지않게 의미 있어

시범사업에 참여한 강북구 미아동 삼양제일내과의원은 모두 1471명을 검사해 173명의 우울증 양성자를 찾아냈다. 116명이 자살위험군으로 판단됐다. 그 가운데 53명이 보건소 사례 관리자로 등록돼 전문 상담을 받고 있다.

의원에서 1차 우울증 선별검사를 도맡는 이미희 방사선사는 “20년 넘게 근무하다 보니 동네 주민들의 건강과 집안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그만큼 라포(신뢰 관계)도 형성돼 있다”면서 “평소 알던 분인데 우울증 검사의 점수가 높게 나와 깜짝 놀랄 때가 있다”고 했다.

동네의원인 만큼 노인이나 만성질환자뿐 아니라 감기 등 가벼운 질환으로 오는 젊은 사람들도 많다. 만 19∼64세의 경우 노인과 다르게 설계된 PHQ-9라는 우울 측정 척도를 사용한다. 마찬가지로 점수가 10점 이상 나오면 2차로 자살 위험성 평가가 진행되는데, 약국과 달리 의사가 직접 맡는다. 근처에서 붕어빵 판매 노점을 하는 30대 남성이 자살 고위험군으로 평가돼 24시간 내 전문가의 응급 위기 개입이 이뤄지기도 했다.

삼양제일내과의원 우종욱 원장은 “당뇨나 고혈압 환자는 치료 못지않게 삶의 질을 높이는 게 중요하다. 우울증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라면서 “자살 위험군인 우울증 환자를 찾아내 1명이라도 자살로 이어지지 않게 한다면 암 발견 못지않게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5개월간 자살 위기자 161명 찾아내

강북구는 2015년과 2016년 인구 10만명당 자살률이 각 30.6명으로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2년 연속 1위였다. 노인과 기초생활수급자 가구 등 신체와 정신건강 취약층이 다른 자치구보다 많은 것 등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동네 병·의원, 약국, 한의사와 손잡고 자살률 낮추기에 나선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지역민의 질병 및 건강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끈끈한 유대 관계를 갖고 있는 동네 단골 의사와 약사, 한의사를 자살 예방 ‘게이트 키퍼’(생명 지킴이)로 활용해 벼랑 끝에 서 있는 자살위험군을 조기에 발굴해 적극 관리함으로써 자살을 예방하자는 취지다.

공공기관인 보건소나 보건지소가 아닌 동네 병·의원과 약국 등에서 자살 위기자 조기 검진이 시도된 것은 강북구가 국내 처음이다.

시범사업 연구용역 책임자인 가톨릭의대 예방의학교실 임현우 교수는 19일 “폐암 환자의 조기 발견과 치료를 위해 정기적으로 폐암 검진을 받는 것처럼 우리 이웃에서 발견이 쉽지 않은 자살 위기자를 능동적으로 발굴하고자 하는 사업이다. 충북 충주의 보건소에서 노인 대상 시범사업을 통해 자살률을 떨어뜨리는 효과가 입증됐다”고 말했다.

강북구 내 일반내과와 외과의원 등 비정신과 의료기관 3곳, 약국 2곳, 한의원 2곳 등 7개 기관이 시범사업에 참여했다.

연구팀은 최근 5개월간의 시범사업 결과 보고서를 강북구 보건소와 복지부에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시범사업기간에 모두 2174명(60세 미만 883명, 60세 이상 1291명)이 1차 우울증 선별검사를 받았다. 이 가운데 12.2%(265명)가 우울증 양성자로 나왔다. 30대의 우울증 양성률이 제일 높았다. 심층 자살 위험성 평가에선 161명의 자살 위기자를 찾아냈다. 그들의 51.6%(83명)가 보건소 자살예방팀의 사례 관리자로 등록됐다. 시범사업 동안 83명 가운데 자살 시도자나 자살자는 나오지 않았다.

자살자 50∼75%, 직전 동네의원 방문

자살로 사망한 사람들은 자살 전에 정신과보다 1차 의료기관을 찾는 경향을 보인다. 실제 자살자의 50∼75%가 사망 한 달 전 동네 병·의원을 방문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특히 노인의 경우 주위 시선이나 정신과 환자라는 낙인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분장애나 정신과 증상을 동네 의사에게 표시한다는 것이다. 1차 의료기관 의사는 우울증과 자살 생각이 있는 환자를 발견하는 데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는 셈이다.

임 교수는 “중증 우울증 환자군에서 63.2%가 자살 생각을 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는 20.2%나 된다. 자살 예방의 출발점은 우울증의 조기 발견과 치료”라고 설명했다.

자살의 단계는 막연하게 죽음을 생각하는 등 소극적 자살 생각 단계에서 구체적으로 계획하거나 시도하는 적극적 자살 생각 단계로 이뤄진다.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발견·관리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자살 단계에 있는 사람들에 초점을 두고 이들을 능동적으로 선별해 내 관리할 필요가 있다. 복지부 산하 중앙심리부검센터 이구상 부센터장은 “우울증 환자들이 가장 많이 농축돼 있는 곳이 바로 동네 의원”이라며 “1차 의료기관에서의 우울증 스크린이 특히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우울증 환자나 자살 위기자를 찾아내는 데 그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사후 사례 관리와 정신과 치료 및 복지 서비스와 연계 체계를 구축해 적극적 중재에 나서야 한다. 자살 시도자는 다시 시도할 확률이 일반인에 비해 200배 높다. 사례(중재) 관리를 받은 사람은 거부자에 비해 자살률이 3분의 1 수준으로 낮다.

우울증 선별검사 수검률도 높여야 한다. 강북구에선 5개월간 2000명 넘게 모니터링이 이뤄졌지만 전체 강북구민(32만9000여명)의 0.7%에 불과하다. 수검자 확대를 위해 1차 의료기관이나 약국, 한의원 등의 참여를 늘리는 게 우선 과제다. 강북구는 1차 시범사업 7곳을 포함해 올해 참여기관을 33곳으로 늘려 이달 8일부터 2차 시범사업에 들어갔다. 참여 기관에 의료 수가(진료 대가)나 인센티브 제공 등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복지부는 강북구 모델의 타당성과 비용 효과성을 따져 다른 지역으로 확대를 추진할 방침이다. 우울증 및 자살 위험성 평가 도구의 건강보험 확대 방안도 검토 중이다. 우울증 스크린이나 자살 위험성 평가의 질 관리를 위해 비정신과 영역 의사나 약사 등에 대한 정기 교육도 필요하다. 강북구 보건소 관계자는 “이번 사업이 실제 자살률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오는 9월 통계청 자료를 기다려 봐야 한다”면서도 “자살률 20% 감소가 목표”라고 밝혔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