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때는 힘들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만큼 즐거운 현장이 없었던 것 같아요. ‘행복’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더라고요. 행복, 했어요.”
데뷔 1년여 만에 맡은 첫 원톱 주연. 영화 ‘리틀 포레스트’(감독 임순례)를 내놓은 배우 김태리(28)의 얼굴에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읽혔다. 기쁨 설렘 뿌듯함 그리고 부담감. 개봉 전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부담이 크다. 많은 분들이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작품 시작할 때는 그런 부담과 고민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현장에 저만 있는 날이 많은 거예요. ‘정말 나밖에 안 나오는 영화인가’ 싶기도 했죠(웃음). 작품을 다 마무리하고 관객들께 선보이게 되니 부담이 많이 됩니다.”
단순히 ‘내 영화라서’ 흥행이 돼야 한다는 식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는 “일반적인 영화들과 결이 다른, 이렇게 소박하고 담담한 영화도 잘 돼야 더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겠나. ‘리틀 포레스트’는 좋은 영화이기 때문에 잘됐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이런 걱정은 ‘괜한 것’으로 남았다. 지난달 28일 개봉한 영화는 손익분기점(100만명)을 넘은 데 이어 130만 고지를 밟으며 장기흥행 중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소확행’(일상 속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 가능한 행복)을 일깨워주며 줄호평을 얻고 있다.
동명 일본만화를 바탕으로 한 ‘리틀 포레스트’는 자연의 참맛을 아는 소녀 혜원(김태리)의 사계절을 그린다. 대학에 입학하며 상경했으나 각박한 도시생활에서 ‘마음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 혜원이 고향집으로 돌아와 죽마고우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 그리고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이야기다.
“시나리오가 굉장히 특별했어요. 글로 적힌 사계절의 풍경들이 찬찬히 기억되더라고요. 분위기 자체가 마음에 들었어요. 임순례 감독님에 대한 확신도 있었어요. 이 영화와 매우 잘 어울리시는 분이셨거든요. 감독님도 저를 마음에 들어해주셔서 쉽게 선택했죠.”
혜원을 완전히 이해하고 표현하기까지는 적잖은 고민이 필요했다. 김태리는 “인물의 전사와 관련된 추상적 고민들을 나 스스로 정리해야 하니까 생각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혜원이 제대로 읽히지 않더라. 시나리오 자체가 가볍게 느껴지기고 했다”고 토로했다.
“그때 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라. 덜어내는 게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다. 표현을 깊게 하면 관객의 몫을 빼앗게 된다. 주인공 비중이 큰 데 따른 지루함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결국 무겁지 않은 톤으로 가자는 결론을 얻었죠.”
김태리는 “혜원이가 시골에서 나고 자란 아이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게 가장 중요했다”면서 “친구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해답을 찾았다. 혼자 있을 때는 도시에서의 지침과 힘듦에 침체돼있지만 친구들과 있을 땐 자신도 모르게 풀어져 생기와 에너지를 발산한다”고 설명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김태리는 혜원의 ‘도시생활’에서 공감을 얻었다. “저도 어렸을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어요. 카페 패스트푸드점 편의점 등등. 학교에서 하는 장학 아르바이트도 꾸준히 했죠. 편의점 바코드 찍는 건 스태프들보다 제가 더 잘했어요(웃음).”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는 양파 아주심기에 대한 내레이션이라고. “‘겨울을 겪어낸 양파는 봄에 심은 양파보다 몇 배는 달고 단단하다’는 대사가 있어요. 고통을 견디고 일어났을 때 더 단단해질 거라는 의미죠. 모든 순간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전부 의미 있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어요.”
김태리는 “이 영화의 의미가 지금 시대에 필요한 정신이지 않나 싶다. 그래서 더 의미가 있는 것 같다”며 “판타지가 될 수도 대리만족이 될 수도 있지만, 현실 속 우리가 꿈꿔보지 못했던 ‘쉼’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데 나름의 큰 의미를 뒀다”고 얘기했다.
영화 ‘아가씨’(박찬욱·2016)로 혜성처럼 데뷔한 김태리는 거침없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1987’(장준환) ‘리틀 포레스트’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서 또 다른 도전을 앞뒀다. 김은숙 작가 신작 ‘미스터 션샤인’(tvN)으로 드라마 첫 주연에 나선다. 상대역은 무려 이병헌이다.
1900년대 초, 일제강점기 직전 의병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에서 김태리는 미국 국적의 한국계 의병(이병헌)과 사랑에 빠지는 명문가 딸 고애신을 연기한다. 앞서 트레일러 영상에서 머리를 질끈 묶은 채 장총을 든 그의 모습이 공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김태리는 “그 영상이 벌써 공개되다니 깜짝 놀랐다. 히든카드일 줄 알았는데”라며 웃었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라고. “지금은 걱정밖에 없어요. 걱정 우려 불안. ‘작품에 해가 되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최선을 다해야죠(웃음).”
그를 향한 세간의 평가는 떠들썩하기 그지없다. “괴물 신인”이라느니 “충무로 차세대 스타”라느니. 그러나 김태리는 단단하다. “외부 평가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그보다 자체 평가를 믿는 편이죠. 댓글도 되도록 보지 않으려 노력해요. 제 마음의 파장이 커질까봐.”
고단한 도전의 연속. 그 과정에서 동시에 힘을 얻는다. “작품을 할 때마다 굉장한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래도 완성된 작품을 선보이는 순간은 매번 뿌듯하고 즐거워요. 이런 걸 보면, 제가 좋아하는 일이 맞는 것 같네요(웃음).”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