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바람이 아직도 차가운 3월의 함부르크 항구. 대도시가 드러내는 화려한 랜드마크 빌딩은 없지만 담백함이 있다. 그의 현재 일상을 닮았다. 쓸쓸이 나부끼는 선박의 깃발에 채 보내지 않은 겨울의 한기가 묻어 있다. 갯바위에 부딪히는 물결이 비늘처럼 반짝인다. 항구 저편을 향한 그의 눈빛이 막 누선이 터지기 시작한 사춘기 소녀의 눈망울 같다. 대양 저편에 그리움이 있을 터였다. 고향을 떠나온 지 45년이다.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박신숙(64) 권사에게서 찬송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왔다. 병원 출퇴근길 그의 입술은 늘 찬양으로 채워졌다. 그는 지금껏 한길만을 걸어온 동양의 작은 천사, 현역 파독 간호사다.
인생의 꽃망울이 막 터지기 시작한 스무 살이었다. 간호학교 졸업 후 보건소에서 일하던 중, 파독 간호사에 지원했다. 그에게 독일은 가난하고 남루한 미래를 벗어던질 보증수표였다. 1973년 뤼벡 대학병원에서의 근무가 시작됐다. 언어문제와 향수병이 고문처럼 옥죄어 왔다. 근무를 시작한 지 6개월이 되던 때, 응급실에 교통사고 환자가 실려 왔다.
“병실에 커피를 나눠주고 나오는데 저에게 살짝 쪽지를 주는 거예요. 자신이 독문학과 학생이라며 저의 독일어 문법을 교정해 주겠다는 겁니다.”
반나쉬 빈프리트 학생이 입원한 7주 동안 그들은 환자와 간호사로 때론 독일어 학생과 선생으로 시작해 연인이 됐다. 반나쉬는 청소년 시절 부모를 여읜 고아였다. 독학으로 대학을 다닌 생활력 강한 청년이었다. 4년 후 대학 졸업과 함께 함부르크에 있는 중·고등학교의 독일어 교사로 발령이 났다. 웨딩마치를 울린 후 두 사람은 함부르크로 이주했다. 결혼 당시 한국에서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가 독실한 신자였지만 외국인과의 결혼은 반대하셨어요. 나중에 집에 가서 보니 형제들 결혼사진은 다 있는데 우리 부부 것만 없더군요.”
남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한국을 방문했다. 어머니는 낯선 얼굴의 사위를 살가워했다. 이름 첫 자를 따서 ‘반 서방’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삶의 고뇌를 믿음으로 이겨낸 강한 여인이었다. 두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큰오빠가 정신질환으로 10년을 병치레하다 집안이 풍비박산됐어요. 그렇게 사랑하던 큰아들을 보내고 둘째아들까지 먼저 갔는데 어머니는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어머니는 하나님보다 두 아들을 더 사랑한 자신을 회개했다. 하지만 박 권사는 그런 어머니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쁨을 하나님이 빼앗아갔다고 불평했다. 결국 독일에 와서는 믿음을 저버렸다. 죄의식도 없었다.
한번은 온 가족이 한국을 방문했다. 친인척 중 7명 이상이 신실한 목회자가 돼 있었다. 어머니 또한 늘 가정예배를 드리며 주님과 교제하는 모습에 박 권사의 가슴이 조금씩 뜨거워졌다. 주님을 향한 이끌림에 82년 한인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남편도 교회로 발걸음을 돌렸다. 남편은 한국의 어머니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30년 동안 3개월에 한 번씩 자신의 월급에서 2000마르크를 떼어 한국으로 송금한 효자 사위였다. 소통을 위해 한국어를 독학으로 배우고 한식을 즐겼다. 특히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을 때도 견고한 믿음을 유지하자 이에 감동했다.
“당시 치매 걸린 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면 쳐다보지도 않다가 ‘권사님’ 하면 대답을 하는 거예요. 어머니는 치매인데도 ‘믿지 않는 친구들이 있어서 전도하고 하늘나라 가겠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박 권사의 독일에서 삶은 안정을 찾아갔다. 근무하던 병동에서 수간호사로 인정받았고, 의사들은 큰 수술이 있을 때마다 유독 박 권사만 찾았다. 교회에서는 성가대장으로, 함부르크 한인합창단장으로 분주한 일상을 보냈다. 그러던 2003년 아우토반에서 큰 사고를 겪었다.
“뒤차가 들이받아 세 바퀴를 돌고 멈춰 섰어요. 멀리서 차가 오는 게 보였는데 다행히 부딪히진 않았죠. 그때 천사가 붙들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3년 또 한 번 인생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우연히 건강검진을 하면서 유방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동안 저는 독일에서 외로웠고 혼자라는 느낌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새벽예배마다 눈물로 기도하는 모습이 보였어요.”
하나님 은혜 속에 살았음에도 원망만 하고 살아온 자신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때 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여종이 되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마취에서 깨어난 박 권사는 새롭게 태어났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성경말씀에 따라 근무 중에도 교회와 힘든 지체를 도왔다. 병든 사람을 위해 중보하고,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을 위해 일 주일에 한 번 장을 봐주거나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있다. 교회 성가대장으로 유학생 성가대원들의 어머니 권사로 통한다. 그때마다 찬양을 통한 고백은 늘 그분의 은혜밖에 없다.
“나의 달려 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