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겨우 53세인 아름답고 건강했던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태국에 거주하는 김지현(32)씨는 지난 12일부터 고향인 경북 김천의 한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병을 치료하러 갔던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서다. 아내와 두 자녀는 태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지만, 김씨는 매일 오전 8시부터 홀로 이곳에서 고독한 싸움을 한다. 몇 개월간 지속된 병원의 ‘책임 회피’에 지쳐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악몽 같은 상황은 약 3개월 전 시작됐다. 김씨는 지난해 11월 29일 한국에서 다급히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건강했던 어머니가 자궁 물혹 제거 수술을 받다가 위독해졌다는 소식이었다. 꼬박 하루를 걸려 급히 고향을 찾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숨진 후였고 부검에 들어간 터였다. 사인은 ‘복강경 수술 중 동맥·정맥 파열 및 출혈성 쇼크’. 수술 집도의의 과실로 추정됐다. 김씨는 다음날인 12월 1일에야 입관하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김씨의 어머니 고(故) 김은옥씨가 받은 수술은 난소에 생긴 낭종을 제거하는 복강경 수술이었다. 복강경은 개복하지 않고 복부를 0.5~1㎝ 정도만 절개한 뒤 일종의 내시경을 넣어 레이저 등으로 수술하는 것을 말한다. 개복수술에 비해 출혈이 훨씬 적고 비교적 간단하다.
어머니는 김씨가 태국에서 전화를 받은 당일 새벽 1시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껴 김천의 A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다. 병원 측은 처음에 맹장염으로 진단했다가 9시간 후 갑자기 “재검진 결과 난소에서 낭종을 발견했다”며 “복강경 수술이 필요하다”고 통보했다. 수술은 오후 1시30분쯤 시작해 3시간 뒤 끝났다. 집도의는 보호자였던 김씨 삼촌 김원이(47)씨에게 “수술이 잘 끝났다”고 전했다.
그런데 병원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삼촌이 병원 측에 상황 설명을 요구하자 그제야 “사실 지혈이 되지 않아 환자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태가 좋지 못하다”며 “병원이 보유한 혈액이 부족하다”고 했다. 삼촌의 요구로 김씨 어머니는 약 한 시간 뒤 인근 B병원으로 이송됐다. B병원 측은 “환자 맥박이 불안정하고 동공이 풀려있는 것으로 보아 뇌사가 우려된다”며 급히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꼬박 두 시간이 걸렸다. B병원은 “A병원에서 13곳 이상 동맥과 정맥 혈관을 손상시켜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저혈량성 쇼크’가 발생했다. 미세한 출혈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 매우 위독하고 의식이 회복돼도 뇌사 상태일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김씨 어머니는 다음날 새벽 3시41분 중환자실에서 결국 사망했다.
익명을 요구한 A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당시 74세로, 이미 의료 활동을 그만둔 상태였다고 한다. 이 병원의 산부인과 전문의가 출산휴가로 자리를 비우게 되자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임시로 복직된 거였다. 김씨의 다른 삼촌 김산주(49)씨는 “그 의사가 대처만 잘했다면 누님이 살아계셨을지도 모른다”며 울먹였다.
유족은 A병원의 과실보다도 ‘적반하장’ 태도에 더 화가 난다고 했다. 유족이 김씨 어머니 사망 직후 A병원에 달려가자 병원은 “오후 2시에 다시 오라”고 했다. 약속한 시간에 다시 병원을 찾아 언성을 높이고 항의했더니 그제야 병원장, 원무과장, 집도의 등이 참석한 자리가 마련됐다. 병원 측은 그 자리에서 “잘못했다. 죄송하다”고 시인했지만 이후 외동아들인 김씨가 한국에 도착한 뒤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례식장에 병원장만 얼굴을 내비쳤을 뿐이었다.
김씨는 “3개월 정도 지난 현재까지 집도의로부터 직접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며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씨가 시위하는 것을 본 병원 관계자는 달려 나와 “원하는 게 뭐냐” “이런 식으로 하면 원만한 합의에 도움 안 된다” “그 의사는 이제 우리 병원에 없다”는 말을 했다. 삼촌 김산주씨는 “병원에서 계속 진정성 있는 사과를 했다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찾아가 고래고래 소리 지른 뒤에 하는 게 어떻게 사과냐”며 “말만 ‘죄송하다’ 하면 사과냐”고 했다.
김씨는 시위를 시작한 후 페이스북에도 사연이 담긴 글을 올렸다. 김씨 글은 500회 이상 공유되며 화제가 됐다. 글을 본 김천 주민들은 시위 중인 김씨를 찾아와 음료나 빵 등을 건네며 격려했다. 김씨는 하루에도 5~6명의 시민이 “저 병원 결국 일냈구나” 등의 말을 한다고 전했다. 김씨에게 먼저 “이 사람이죠?”라며 집도의 실명을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 김씨는 “더는 어머니와 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길 바란다”며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다”고 했다.
김씨는 집도의를 과실치사 혐의로 형사 고소하고 손해사정인을 통해 병원에 대한 민사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에 따르면 의료과실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대한의사협회의 심사 결과가 필요하다. 그 과정이 6개월이나 걸린다. 그때까지 김씨는 거리에서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김씨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가족이 있는 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밝혔다.
병원 원무과 관계자는 “분명히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그 자리에 아들분이 개인 사정상 있지 않았던 것뿐”이라며 “정 사과를 원하시면 사무실로 들어온 후 원하는 걸 말씀하셔야지 시위를 하면 어떡하냐”고 했다. 그러면서 “아들분이 원하시면 사과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