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2월 13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사진) 피살 당시 주요 정황이 추가로 공개됐다. “‘몰래카메라’ 촬영이라는 거짓말에 속아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주요 여성 용의자 2명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이다.
로이터통신은 14일(현지시간) 말레이시아 샤알람 고등법원 공판에서 용의자 도안 티 흐엉(20)의 변호인 측이 공개한 베트남 여성 응우엔빗 투이의 경찰 조사 당시 증언을 보도했다. 사건이 벌어지기 전 용의자들이 받은 것과 같은 제의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로이터와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현지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서 술집을 운영하던 투이는 사건이 일어나기 약 2개월 전인 2016년 12월 27일 ‘Y’라는 가명을 쓰는 남성에게서 단편영화에 배우로 출연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후일 경찰 조사과정에서 이지현(34)으로 이름이 밝혀진 Y는 피살을 계획하고 지시한 주요 북한 국적 용의자 중 하나다.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밝힌 이씨는 자녀가 없는 이혼남으로 투이에게 스스로를 소개했다. 투이는 어린 아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제의를 거절했다. 제안을 거절당하자 이씨는 투이에게 지인 중 대신 일할 사람을 연결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투이는 과거 다른 술집에서 함께 일했던 지인 흐엉이 영화 출연에 관심있는 걸 기억하고 이씨에게 소개해줬다. 흐엉은 김정남의 얼굴에 VX 신경작용제를 발라 살해를 직접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여성 용의자 2명 중 하나다. 김정남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아온 흐엉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26)는 체포 당시부터 자신들은 리얼리티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으로 알고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해왔다.
투이는 이씨가 자신의 술집으로 찾아온 흐엉에게 공항 몰래카메라 출연 제안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씨는 흐엉에게 예쁘게 차려입고서 특정인의 머리에 액체를 끼얹어 달라고 했다. 이후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흐엉은 이씨가 베트남어를 매우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기억했다. 흐엉이 경찰조사에서 자신의 직업을 ‘배우’로 진술한 점 역시 투이의 증언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당시 이씨는 매달 1000달러(약106만원)의 급여를 주는 조건으로 흐엉을 고용했다. 흐엉의 첫 촬영은 하노이의 명소 중 한 곳인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진행됐다.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 키스를 하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상대가 피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변호인 측은 조사 당시 말레이시아 경찰이 이 같은 중요한 증언을 확보해놓고도 베트남까지 수사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핑계로 제대로 사건을 수사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말레이 경찰이 두 여성을 희생양 삼아 북한 정권의 정치적 암살이라는 이번 사건의 본질을 외면하고 외교적 파장을 최소화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말레이 검찰은 흐엉과 시티가 범행 후 화장실로 이동해 손 씻는 모습이 담긴 공항 내 CCTV 영상을 법정 증거로 제출하며 그들의 살인 혐의를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 흐엉과 시티의 변호인들은 수사당국이 증거를 취사선택해 짜깁기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한편 이들에게 VX를 건네고 김정남의 얼굴에 바르도록 한 이씨와 홍송학(35), 이재남(58), 오종길(55) 등 북한인 용의자 4명은 범행 직후 출국해 북한으로 도주한 상태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