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감까지 느끼고 있다.”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이 15일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이 말을 했다. 배신감을 느낀 대상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고, 까닭은 국정원 특활비를 제공했는데 그 돈을 국가운영에 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그는 변호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이 같은 발언을 했다. 박근혜정부에서 주일대사, 국정원장, 청와대 비서실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이가 자신이 보좌했던 대통령을 향해 결국 ‘배신감’이란 말을 꺼내 들고 말았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법에서는 형사합의32부 심리로 남재준 이병기 이병호 등 박근혜정부 국정원장 3명에 대한 특활비 상납 혐의 첫 재판이 열렸다. 피고인석에 나란히 자리한 세 사람은 직접 또는 변호인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변호인들의 모두진술이 끝나고 재판부가 피고인들에게 직접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각자 한마디씩 했다.
남 전 원장은 변호인을 통해 “이 사건의 구체적 경위와 범죄 성립 여부를 떠나 국민께 실망감과 심려를 끼쳐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자 한다”며 “결과적으로 특활비가 잘못 집행됐다는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병기 전 원장은 직접 피고인석에서 일어나 “그렇게 (청와대에) 올려드린 돈이 제대로 된 국가운영을 위해 쓰였다면 하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와 반대로 쓰였다”며 “배신감까지 느끼고 있다”고 했다. 그는 “국가예산을 사용하는 데 지식이 모자랐던 책임이 있다면 기꺼이 사법적 판단을 받겠다”고 덧붙였다.
이병호 전 원장은 특활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는 점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국정원장에 임명됐으면 지금 이 법정에 서 있는 것은 제가 아니라 그 분이었을 것”이라며 “개인 비위, 부패의 문제가 아니라 오랫동안 이어져온 제도적 미비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는 입장이었다. 청와대에 특활비를 전달한 사실관계는 인정하지만 직속상관 기관인 청와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고, 특활비 중 청와대 몫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국가운영을 위해 쓸 줄 알았기 때문에 범의(犯意)가 없었다는 것이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