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기밀이 담긴 특종보도를 놓고 정부와 언론의 갈등을 그린 영화 ‘더 포스트’가 개봉 2주차 만에 10만 관객을 돌파했다. 미국 대통령 네 명이 30년간 은폐해 온 베트남 전쟁 비밀이 담긴 정부기밀문서를 세상에 폭로하기 위해 사활을 건 특종 보도 실화를 영화로 재구성했다. 묵직한 시대적 메시지를 전하며 ‘올해 최고의 영화’로 평가 받고 있다.
◇ ‘펜타곤 페이퍼’로 드러난 美 정부의 민낯
1971년 3월, 뉴욕타임즈 기자 닐 시언은 ‘펜타곤 페이퍼’를 손에 넣었다. 1945년부터 1967년까지 미국 정부가 정치·군사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역사를 담은 7000페이지 분량의 1급 기밀문서다.
1967년부터 2년간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이던 로버트 맥나마라와 책임자 레슬리 겔브 지시로 작성됐다. 여기에 36명의 장교와 민간 정책 전문가들, 역사학자들이 동원돼 방대한 분량을 완성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 안에는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네 명의 대통령이 차례대로 지시한 일이 적혀있었다. 프랑스와 베트남이 맞붙은 1차 전쟁서 라오스에 대한 고의 폭격, 반공 정치를 펼친 베트남 응오 딘 지엠 정부를 지원한 일 등이다.
가장 문제가 된 내용은 미국이 베트남전에 군사를 개입하게 된 계기인 ‘통킹 만 사건’이었다. 1964년 8월 북베트남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를 선제공격했고, 미국은 이를 구실 삼아 전쟁을 더 크게 벌이는 것에 정당화를 가한 것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진실은 달랐다. 도발이 아닌 전쟁이 확대되기를 바랐던 미국의 조작이었다. 실상이 가려진 채 무고한 젊은이들이 승전 가능성도 없는 전쟁으로 내몰렸다는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 “국민의 알 권리, 정부기밀보다 우선한다”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즈가 배포되자 전 세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미국 국민은 충격에 빠졌고 반전운동은 확산되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없이 번지자 보도 이틀 후인 15일 닉슨 정부는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연방법원에 후속 보도를 금지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1심서 임시보도 정지 판결을 이끌어냈다.
뉴욕타임스 보도는 금지됐다. 이 틈을 노린 신문사가 있었다. 지방지였던 워싱턴 포스트는 뒤늦게 혼란 속으로 뛰어들어 베트남 전쟁 관련 문서 4000장을 입수했다.
보도는 쉽지 않았다. 당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있던 워싱턴 포스트, 이 보도 하나에 회사 존폐를 걸어야 했다. 모두가 말렸지만 고심 끝에 감행키로 했다. 당시 언론계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발행인이었던 캐서린과 그녀의 친구 편집장 벤은 언론인 사명을 걸었다.
1971년 6월 18일, 워싱턴 포스트는 베트남전쟁의 진실이 담긴 후속보도를 내놨다. 선택은 옳았고 후폭풍은 거셌다. 미국 정부가 그동안 은폐해 온 진실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간 대통령 일가족의 신변잡기에만 집중한다는 평을 받아오던 워싱턴 포스트는 이 보도 후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로 승격되었다.
이어진 2심에서 연방 대법원은 마침내 ‘국민의 알 권리’에 손을 들어주었다. 당시 판결을 맡은 휴고 블랙 판사는 “미국 헌법이 언론자유를 보장한 것은 정부의 비밀을 파헤쳐 국민들에게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에 이어 ‘더 포스트’ 각본에 참여한 조쉬 싱어는 “이 영화는 단순히 특종에 관한 게 아니다”라면서 “거대 권력에 맞서 진실을 밝혀내는 평범한 언론인들의 용기와 대담함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