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 57. 반복의 역사, 우화 같은 현실 “최서림 야화순례 기행전”

입력 2018-03-11 23:08

현실과 비현실의 신비한 경계를 넘나드는 야화(野話)는 구수하다. 극단 백수광부의 <최서림야화순례 기행전>는 (최치언 작, 이성열·최치언) 공동연출로 ‘코르코르디움’ 기획으로 3월3일~11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할머니 이야기 품이 그리워지는 연극이다.

반복의 역사, 현재이야기


수천 년 동안 인간의 탈을 쓰고 전쟁과 죽음의 역사로 세상을 지배하며 살았던 너구리들 이야기는 반복되는 역사, 현재이야기로 환기시킨다. 수천 년 동안 구전과 야화로 전해 내려오는 ‘권선징악’의 결말은 비현실적 세상이 아니라 반복의 역사다. 역사는 전쟁과 죽음으로 삶의 영토를 확장해 국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세계역사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무대가 됐다.

추악한 가면으로 가려진 포악함과 잔인함, 헤아릴 수 없는 실종과 죽음, 인간의 비열한 욕망과 탐욕, 전쟁의 승부사(史)는 역사로 박재되어 <최서림의 야화순례 기행전>에서 풍자 될 수 있는 우화(寓話)로만 들었으면 좋겠다. 아쉽게도 악(惡)이 들 끊는 세상이다.

연극은 미스터리한 산골마을(너구리골) 노귀종의 실종사건을 다룬다. 이 사건을 담당하게 되는 최서림(순경)은 실종사건의 실마리를 풀기위해 추리극처럼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가 상상 속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현실로 좁혀온다. 미국서 살다 출장소로 찾아온 동생 노귀희와 <너구리골>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게 중첩되면서 무대는 그로테스크한 동화의 세계를 그려낸다.

할머니 얘기로 돌아가 보자. 손자 잠을 재우기 위해 꺼내든 늦은 밤, 할머니의 구전이야기는 수천 년 고개를 넘어 ‘구불구불’ 할머니 상상으로 신비한 이야기 세계는 증폭된다. 할머니는 작가정신을 발휘하며 상상으로 끌고 달리는 이야기 정점에서는 몽환적인 괴기함과 섬뜩함이 비벼지고, 이야기를 듣는 현실과 이야기 속 비현실의 경계에서 가슴을 이불 속으로 덜컹거리게 만들고 현실로 후려친다.

할머니 마지막 대사는 “ 착하게 살아야 된다. 못된 짓 하면 벌 받아”였다. TV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인간의 탈을 쓴 ‘백년 묵은 여우이야기’는 선한 가면으로 꼬리를 숨기고 살아가는 날카롭고, 잔인한 추악함은 인간세상을 파멸과 죽음으로 내몰고 여우의 숙명으로 돌진하면서 끝난다.

<최서림의 야화 순례 기행전>은 너구리들이 인간의 가면을 쓰고 둔갑해 저지른 사악함과 폭력의 역사성, 전쟁과 죽음, 반복되는 인류의 영토전쟁, 지배의 탐욕 속에서 사라져 버린 영혼의 죽음들을 쓰다듬고 우화적으로 환치한다. 가면의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영혼을 들고 ‘권선징악’ 이라는 단순 플롯구조를 비틀고 반전시키며 담아내는 풍자의 속살은 추악한 인간의 욕망, 전쟁, 죽음과 공포, 폭력성을 쓸어 담는 반복의 역사이며 현재도 유효한 세상이야기다.

우화적으로 꺼내든 이 시대의 ‘권선징악’ <최서림 야화순례 기행전>


무대는 마치 수천 년 동안 할머니에게 구전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무대전경은 극장을 둘러싸고 있는 앙상한 자작나무 숲으로 을씨년스럽다. 인간의 온기가 닿지 않는 폐허의 공간이다. 손길이 멈춘 듯 허름한 자전거, 빛바랜 라디오, 소리가 멈춘 레코드와 뭉개져버린 의자, 녹슨 냉장고와 TV, 농기구자재들이 을씨년스러운 바람과 폭우로 분위기를 일으켜 세우며 묘한 미장센을 이루고 있다.

폭우로 바람에 일으켜 세우는 무대는 영상으로 투사되는 동화 속 ‘너구리 아이들’이 등장해 이야기 짖기를 좋아한 극중 인물 ‘최서림’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당기면서 시작된다. 서른아홉, 늦은 나이에 경찰에 입문한 시골순경 최서림이 인적 드문 산간벽지 너구리골에서 발생한 1년 전 노귀정 실종 사건을 담당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무대는 최서림이 지어내는 우화의 세계로 일순간 바뀐다.

언니와 쌍둥이 동생 귀희(박윤정 분·1인2역)가 25년 만에 언니 실종소식을 듣고 최서림의 출장소를 방문하기 전, 무대는 인간으로 둔갑해 마을을 지배해온 너구리들과 강가 쥐들이 나타나고 동생 귀희는 언니의 실종과 죽음의 발자국을 따라 산골마을 전원주택으로 향하게 된다. 실제 두 사람이 전원주택(너구리골)으로 향하면서 실종사건은 최 순경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가 현실로 꼬리를 물고 동화는 현실로 중첩된다.

한 여인의 실종과 죽음은 인간으로 둔갑한 너구리들의 소행이라는 최서림의 추리와 노귀정과 귀희(권선징악)를 동일 인물로 설정해 선함이 악함을 물리친다는 ‘권선징악’의 결말을 하루 동안 일어나는 최서림의 상상 속 이야기를 통해 담고 있다. 마치, 억울한 죽음을 당한 여인이 환생해 그 악함을 물리치는 ‘복수극’을 보는 듯하다.

실종사건과 언니의 죽음이 발생한 전원주택은(주아, 동수, 화영, 기태) 부부들의 변태적인 놀이와 괴기한 행위로 인간의 탈을 쓴 추악한 욕망만이 숨을 쉬고, 마음이장으로 둔갑한 노연명(민병욱 분)도 인간으로 둔갑해 살아온 너구리로 설정된다. 연극은 마을이장과 부부들을 인간으로 둔갑한 너구리와 쥐들을 인간으로 둔갑시켜 수천 년 세월동안 이어져 오는 전쟁의 역사, 폭력, 죽음, 탐욕과 욕망에서 터져 나오는 인간의 희생을 우화적으로 비틀고 풍자로 날을 세운다.

인간으로 둔갑해 마을(너구리골)을 지배해온 너구리들과 인근 강가주변에서 살아가는 쥐들과의 대립구조는 강·소 국가들이 치열한 영토 전쟁을 벌이는 현재 풍경이다. 강가는 시체더미로 인간의 죽음과 피로 강을 이루는 우화 같은 현실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우화 같은 현실’, ‘동화 같은 현실세계’를 인간으로 둔갑한 너구리들의 소행으로 이야기를 증폭시키고,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환생한 여인으로 교차 되면서 무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몽환적 이미지로 무대를 덥고, 강가 쥐들과 인간으로 둔갑해 살아가는 너구리들의 동화 같은 세계가 겹치며 무대 공간은 속도감 있게 변화된다.

<최서림의 야화순례 기행전>은 입체감 있는 한편의 우화를 무대 이미지로 시각화 한 것이 특징인데 회전무대를 통해 자작나무 숲을 무대전체로 폭을 넓히고, 좁히면서도 등장인물 (최서림·노귀희)의 ‘심리 공간’을 이미지 영상으로 투사해 무대를 입체감 있게 변화 시킨다. 또한 자작나무 숲에 있는 음산한 전원주택 풍경을 대도구로 설정하고, 숲의 동일한 풍경을 영상으로 좁혀 투사함으로써 자작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너구리골 무대와 실종사건 무대가 되는 전원주택을 이원화 시켜 장면을 분할한다.

노귀정 생일날 시체를 강가에서 건져 올리고 동생 귀희 에게 ‘이웃사촌’, ‘좋은 이웃’의 억울한 실종과 죽음을 강조하며 생일케익을 자르는 장면은 인간으로 둔갑한 탐욕과 사악한 욕망만이 숨을 쉰다. 강가에서 살아가는 쥐들, 너구리 골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으로 둔갑해 살아온 너구리들은 지배의 탐욕과 전쟁의 역사다.

날카로운 이빨에 물려 강가로 떠밀려 오는 너구리들 시체 더미의 우화의 세상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칼과 총을 겨누고 전쟁, 자폭테러, 학살, 핵무기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우화 같은 현실세계를 풍자한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짐승, 그들은 모르면서도 그의 걸음걸이, 그의 자세, 그의 목덜미, 그의 고요한 눈빛까지 사랑했다. 그들이 사랑했기에 순수한 짐승이 되었다” 라는 최서림의 반복적인 주문을 통해 인간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악한 인간의 욕망을 향해 던지는 ‘사랑과 평화’를 상징하는 종교적인 주술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최서림의 이야기 결말은 노귀희(박윤정분)의 복수극이다. 인간으로 둔갑해 너구리 골을 지배해온 노파(정은정 분)와 너구리들을 응징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노파는 물레를 돌리며 초연하게 실을 뽑아내고, 귀희(권선징악)은 뜨개질 대바늘로 죽음을 이르게 한 노파를 응징하면서 선은 반드시 악함을 벌한다는 ‘권선징악’ 결말로 끝난다. 물레는 여전히 이어지는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반복의 역사다.

이야기 순례의 재치는 여행객을 교차적으로 등장시켜 인간세상을 지배하는 너구리들에게 조롱당하는 장면(춤)으로 웃음을 섞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 여행객(귀희1)이 언니가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에서 찾아온 또 다른 인물로 설정하면서 이야기는 귀신에 홀린 듯 묘한 반전을 이룬다. 최서림의 이야기 순례는 너구리 노파의 대사 “우리를 죽인다고 해서 인간 세상이 바뀌는 건 아니잖아. 우린 또 다른 그놈의 이야기 속에서 선과 악으로 만나겠지. 인간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이야기도 변하지 않아! 차라리 최서림을 죽여!”처럼 ‘권선징악’의 효력은 여전히 대한민국 정치사를 걸어온 것처럼 강하고 유효하다.

허구가 실제가 되고, 현실이 비현실처럼 느껴지는 세상이다. 우화 같은 비현실적 세상은 지구촌에서 들려오는 뉴스와 이야기로 현실감을 피부로 느끼게 된다. 극중 인물 최서림이 지어내는 이야기를 우화 속 동화로만 치부 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점이다. 한 여인의 실종과 죽음을 이르게 한 가해자는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최서림일까. 아니면, 인간으로 둔갑한 너구리들 일까.

우화적인 발상으로 비틀어 보면 사악한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권력구조의 정점의 인물로 최서림을 볼 수 있고, 너구리들은 그 세상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사악한 인간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인간으로 둔갑한 너구리들은 최 서림이 지어낸 이야기대로 살아가야 되니까. 권선징악의 이야기 결말처럼, 악함을 물리치는 것은 선함이지만 죽어가는 노파의 마지막 대사로 기억되는 것처럼 최서림이 죽였을 때 반복되는 역사와 비현실 같은 현실의 부조함이 종결될 수도 있겠는 지도 모르겠다.

이번 <최서림 야화순례 기행전>의 이야기순례 여정은 극장무대 공간을 전체 활용해 입체감을 높이는 것은 돋보였다. 너구리골 이야기, 노귀정의 실종사건, 강가의 쥐들, 귀희와 너구리들 싸움장면, 노파의 죽음, 전원주택과 마을사람들의 이야기 등은 속도감 있게 교차되지 못해 느슨했고 강가의 공간 처리도 모호하다. 또한 무대 앞면에서 이루어지는 너구리들과 강가의 쥐들 장면도 동화의 한 장면이 불쑥 튀어 나온 듯 신비감이 퇴색되어 전체 장면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인상을 줬다. 온전한 하나의 극으로 포개져 겹을 이루어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이번 연극에서 배우들 역할들이 두드러졌고 극의 몰임을 높였다. 특히 1인 2역(귀희/귀종)을 맡은 배우 박윤정은 극중 인물의 역할을 구분 짖는 캐릭터로 현실과 우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끌고 갔다. 최서림 역의 이태형은 과하지 않는 차분한 연기로 이야기를 끌고 갔고 너구리 노파 역의 정은정과 박정민(기태·너구리2)도 캐릭터 있게 인물을 들어냈다.

▶극단 백수광부(白首狂夫는)는 1996년도 창단되어 이성열 연출 <햄버거의 대한 명상>을 출발로 <굿모닝 체홈?>, <봄날>, <그린벤치>, <햄릿아비> 등 공동창작의 재구성과 실험성으로 극단 백수광부의 연극적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극단의 상임연출을 맡고 있는 이성열 연출은 현재 국립극단 예술 감독이다. 공동 연출을 맡은 작가 최치언은 199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해 2011년 희곡 <미친극>으로 대산문학상을 받았다. 희곡·시·소설 등 쟝르를 초월한 글쓰기로 전방위 활동하고 있다.

▶코르크르디움(Cor Cordium) 기획은 이정은 대표로 2006년도에 설립되어 극단 백수광부, 여행자, 작은신화, 실험극장 등 다양한 극단과 협업하고 작품들을 기획해 오면서 작품이 대중적으로 성공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2015년 공연한 ‘인코그니토’(연출 양정웅) 작품은 코르코르디움에서 직접 제작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파이의 시간>, <여우들의 동창회>, <콜라소녀>는 공동으로 제작에 참여했다. <고곤의 선물>, <먼데서 오는 여자>, <말들의 무덤>, <기이한 마을버스 여행-성북동>, 무용<울프>, <지상최후의 농담>, <해주미용실> 등 100여개의 작품을 기획하면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올해 창작산실 공연에서는 <최서림 야화순례 기행전>과 극단 두 <암전>을 기획했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