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중 북·미정상회담에 사실상 합의한 것은 세계를 놀라게 한 ‘극적 반전’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말폭탄’을 주고받으며 한반도를 전쟁 위기로 몰아넣었던 두 ‘스트롱맨’은 2000년 북핵위기 당시 성사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실패했던 북·미정상회담을 18년 만에 눈앞에 두고 있다.
길이 보이지 않던 북·미대화 성사의 과정은 파격의 연속이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탐색대화, 실무급 회담 등 준비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북·미정상회담으로 직행한다는 점도 이례적이다. 특히 북핵문제 해결엔 남북관계 개선 뿐 아니라 북·미대화가 필수적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중재 외교’가 빛을 발했다.
◇김정은 “가능한 빨리 만나길”…트럼프도 곧바로 “좋다”
지난 6일 1박2일간 방북을 마치고 돌아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4월말 남북정상회담’ ‘남북 정상 핫라인 설치’ 등 6개 합의안을 설명하면서 “밝힐 수 없지만 미국에 전달할 북한의 입장”이 있다고 했다.
9일 비로소 드러난 그 메시지의 실체는 북·미정상회담이라는 파격 제안이었다. 김 위원장은 당시 특사단과의 면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면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특사단 면담 당시 “대화 상대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정 실장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이 비핵화 의지를 밝혔으며, 가능한 빨리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어 “김정은을 만나보니 솔직하게 얘기하고 진정성이 느껴졌다”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지만 김정은에 대한 우리 판단을 미국이 받아주고,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설득했다.
백미는 트럼프 대통령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정 실장의 방북 브리핑이 끝난 뒤 트럼프 대통령은 곧바로 “좋다. 만나겠다”며 김 위원장의 방북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던 참모들에게 “거봐라. 얘기를 하는 게 잘한거다”고 말했다. 그동안 이른바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주장하며 북한에 대해 최대 압박기조를 고수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 특사단에게도 “한국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다”며 정 실장에게 “백악관에서 오늘 논의된 얘기를 해달라”며 제안했다.
◇전례없는 속도전으로 결정된 북·미대화
역사적인 북·미대화가 성사되기까지는 닷새간 숨가쁜 외교전이 펼쳐졌다. ‘중매쟁이’를 자처한 특사단은 평양과 워싱턴에서 각각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하며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지난 5일 평양으로 날아간 특사단은 오후 2시50분 순안공항 도착후 약 3시간 뒤에 김 위원장을 접견하고 만찬회동을 했다. 청와대에 따르면 당시 특사단은 방북 첫날에는 김 위원장 접견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숙소인 고방산 초대소로 찾아온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김 위원장이 당일 접견과 만찬에 모두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김 위원장은 특사단을 만나 솔직하고 대담한 화법으로 분위기를 주도했다. 정 실장이 한·미 연합군사훈련 문제 등 현안 얘기를 꺼내자 김 위원장은 먼저 “여러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 “이해한다”며 남북이 합의한 6개 항목을 언급했다. 4월말 3차 남북정상회담, 남북 정상간 핫라인 설치 등 6개 항목은 문 대통령이 평창 올림픽 개막식 때 방남한 북한 고위급대표단에 전달한 내용이었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신속한 화답에 접견은 1시간여 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 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방북 결과를 들고 8일 미국 워싱턴으로 향했다. 현지시간으로 오후 2시30분부터 30분간 정 실장은 허버트 맥매스터 미 국가안보보좌관과, 서 원장은 지나 하스펠 미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을 백악관에서 각각 만났다. 오후 3시부터는 2+2 회동으로 전환됐고, 오후 3시30분부터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 미 행정부 각료들을 상대로 브리핑이 이어졌다.
이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집무실로 빨리 오라”는 전갈이 온 것이다. 당초 일정상 정 실장과 서 원장은 하루 뒤 트럼프 대통령과 만날 예정이었으나 면담 일정이 급히 앞당겨진 셈이다. 정 실장과 서 원장은 급히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로 이동해 트럼프 대통령을 45분간 면담했다. 집무실에는 트럼프 대통령 외에 마이크 펜스 부통령, 존 켈리 대통령 비서실장, 조지프 던포드 합참의장 등 최고위급 외교안보라인이 총출동해 있었다.
의사결정은 신속했고, 5월중 북·미정상회담이 합의됐다. 정 실장은 9일(한국시간)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오늘 브리핑에 감사를 표시하고, 항구적 비핵화 달성을 위해 김 위원장과 5월까지 만날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문대통령, 북·미 ‘중매’ 역할 성공적 수행
문 대통령의 ‘한반도 운전자론’은 탄력을 받았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와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담은 ‘베를린 구상’을 견지하면서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북한의 계속된 미사일 도발에는 국제사회와 함께 적극적인 압박 행보를 취하면서도 본질적으로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접근법을 제시하면서 미국 측을 설득했다.
이는 김 위원장의 신년사와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보다 구체화됐다. 남북이 특사단을 서로 주고받으며 신뢰를 확인했고, 4월말 판문점에서의 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로 이어졌다. 북측의 비핵화 의지를 미국 측에 신속히 전달하며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첫발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
문 대통령은 이날 북·미정상회담 성사와 관련해 “5월의 회동은 훗날 한반도 평화를 일궈낸 역사적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라며 “어려운 결단을 내려준 두 분 지도자의 용기와 지혜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말했다고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밝혔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