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사회 전반에서 터져나온 ‘권력형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범정부 대책을 내놓았다. 앞으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성폭력 범죄에 대해 법정형을 상향하고, 공소시효를 연장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피해자가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피해사실을 공개할 수 있도록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선 위법성의 조각사유를 적극 적용하기로 했다. 성폭력에 대한 사건 은폐, 조직적 방임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온라인 악성 댓글도 엄정 대응한다.
◆ 권력형 성폭력 가해자 최대 5년형 → 10년형
여성가족부는 8일 오전 12개 관계부처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 협의회’ 1차 회의를 개최하고 ‘직장 및 문화예술계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을 확정해 발표했다. 협의회에는 국조실, 기재부, 교육부, 법무부, 고용부, 행안부, 국방부, 복지부, 문체부, 경찰청, 인사처 등 12개 관계부처가 두루 참여했다.
정부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정부비서 성폭력 사건처럼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난행을 저지르는 범죄자에 대한 사건처리 기준을 강화한다. 종속관계 정도, 반복성, 범행결과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다.
현행 업무상 위계‧위력 간음죄의 법정형은 징역 5년 이하, 벌금 1500만원 이하다. 이를 징역 10년 이하, 벌금 5000만원 이하로 상향하는 방안이 검토된다.
또 법정형이 징역 2년 이하, 벌금 500만원 이하였던 업무상 위계‧위력 추행죄도 법정형을 징역 3년 이하, 벌금 2000만원 이상으로 상향 검토한다.
이와 같이 법정형이 각각 상향될 경우 공소시효도 변경된다. 업무상 위계‧위력 간음죄에 경우 현행 7년에서 10년으로, 업무상 위계‧위력 추행죄의 경우 현행 5년에서 7년으로 각각 연장된다.
아울러 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분양에서 성폭력, 사건 은폐, 조직적 방임, 피해자 불이익 처분 등과 관련된 단체 등에는 보조금 지급을 제한할 수 있도록 근거 규정을 마련한다.
◆ 고용부에 ‘익명 신고’하면 행정지도
8일부터 고용노동부 홈페이지에선 직장 내 성희롱 익명 신고 시스템이 운영된다. 익명 신고만으로 행정지도에 착수해 피해자의 신분노출 없이 소속 사업장에 대한 예방차원의 지도 감독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포함해 남녀고용평등 업무만을 전담하는 근로감독관도 배치된다. 특히 외국인 여성노동자의 성희롱 피해 예방을 위해 외국인 고용 사업장을 대상으로 집중점검한다.
현행 사업주의 성희롱 행위는 과태료 1000만원 이하, 성희롱 행위자에 대한 징계 미조치는 과태료 500만원 이하로 처벌된다. 이를 벌금 또는 징역형까지 가능하도록 형사처벌 규정을 강화하고, 법인 대표 이사가 직장 내 성희롱의 직접 가해자가 된 경우 처벌 대상에 포함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 ‘역고소’에 떠는 피해자 무료 법률 지원… 2차 피해도 상담·치료
정부는 피해자의 진술을 어렵게 할 수 있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무고죄를 이용한 가해자의 협박, 손해배상 등에 대한 민‧형사상 무료법률 지원을 강화한다.
만약 상담과정에서 피해자가 해고되거나 불이익 처분을 받는 등 2차 피해가 확인되면 해바라기센터(성폭력·가정폭력 피해자 지원 기관) 연계를 통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한다. 또 ‘성폭력 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 처분에 대한 규정을 구체화한다.
피해자에 대한 상담‧의료 및 심리치료 지원도 확대 된다. 피해자에 대한 심리치료비 지원을 현행 1회당 15만원에서 20만원으로 변경, 2차 피해에 대한 상담‧심리 치료도 강화한다. 공소시효 만료 사건에 대해서도 상담과 의료비 및 심리치료비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미성년자인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에는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권의 소멸 시효를 성인이 될 때 까지 정지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 수사 과정에서도 피해자 우선… 악성 댓글도 수사
수사 과정 전반의 피해자 접촉은 원칙적으로 여성경찰관이 전담한다. 피해자 신분 노출 방지를 위해 가명조서(가명으로 성명을 기재하고, 주민등록번호 등 기재 생략)를 적극 확용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소송 등 2차 피해에 대한 두려움 없이 피해 사실을 공개할 수 있도록 사실 적히 명예훼손죄의 경우 수사 과정에서 위법성의 조각사유(형법 310조)를 적극 적용하기로 했다.
피해자에 대한 온라인 악성 댓글도 사이버수사대를 통해 엄정 대응한다. 경찰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 보복은 가중 처벌 된다는 사실을 강력히 경고하고, 임시숙소 제공과 위치추적장치 제공 등 피해자‧신고자에 대한 체계적인 신변보호를 추진한다.
◆ 문화예술계 특별조사단… 의료계는 기관 평가에 반영
가장 많은 ‘미투’ 폭로가 터져나온 문화예술분야와 의료계에서도 성폭력 근절대책이 광범위하게 진행된다.
우선 문화예술분야에 대해서는 성희롱·성폭력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문체부, 민간전문가 등 10인 내외로 구성된 ‘특별조사단’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특별 신고·상담센터’가 100일간 운영된다.
문체부·여가부가 함께 운영하는 특별 신고·상담센터는 피해자 상담부터 신고, 민형사 소송 지원, 치유회복프로그램 등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한다. 접수된 피해 사례는 경찰 또는 특별조사단과 연계해 고소‧고발을 진행하고, 관련 기관에는 피해자의 2차 피해 방지 및 가해자 징계 등의 조치를 요청한다.
성폭력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문화예술계 인사는 강력히 제재 조치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가해자를 보조금 등 공적 지원에서 배제하도록 상반기 중 국고보조금 지침을 개정하고 국립문화예술기관‧단체의 임직원 채용과 징계규정도 강화하기로 했다.
소관 단체의 성폭력 사건에 대한 조직적 방임 또는 조력, 사건 은폐, 2차 피해 등이 파악되면 관련 행정감사를 실시하고 수사기관에 고발 조치한다. 국가인권위원회와 함께 문화예술, 영화, 출판, 대중문화 산업, 체육 등 5개 분야를 대상으로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도 진행된다. 심층 인터뷰 과정에서 나타난 피해사례는 특별조사단과 연계해 신고 및 피해자 지원 절차를 진행한다.
문체부는 현장 예술인, 전문가 의견수렴을 통해 예술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보호, 침해행위 구제 등을 위한 별도 법률 제정(가칭 ‘예술가의 권익보장에 관한 법률’)이나 개별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의료계에 대해서는 간호협회 인권센터와 의사협회의 신고센터를 통해 의사 선후배간, 의사-간호사간 등 성희롱·성폭력 신고접수를 활성화한다.
의료인의 성폭력 대응 및 피해자 2차 피해 방지, 수사기관 및 성폭력 피해상담소 등의 연계 제도 활용 등을 반영한 대응매뉴얼을 제작·보급하고, 의료인 양성 및 보수교육에 성폭력 예방 교육을 추가·강화하기로 한다.
올해 중 전공의법을 개정해 수련병원의 전공의 성폭력 예방 및 대응 의무규정을 마련하고, 진료 관련 성범죄 외 의료인 간 성폭력에 대해서도 금지 및 처분 규정 마련 등 제재를 강화한다.
전공의 수련환경평가 등을 통해 전공의 대상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대한 조직적 은폐, 2차 피해 등 부적절한 대응이 확인되면 해당 의료기관에 과태료, 의료질 평가지원금 감액 등 강력한 제재 조치를 시행한다.
정부는 의료기관의 대외신뢰도의 척도가 되는 각종 평가에 성희롱·성폭력 예방, 피해자 보호 및 대응 등을 지표로 반영하는 방안도 검토한다.
◆“마침내 터져나온 미투… 행정 조치 조속히 시행”
정부는 이번 대책을 차질없이 추진하기 위해 형법 등 관련 법률 10개를 제‧개정하고, 행정적 조치는 조속히 시행하기로 했다. 민‧관 협력을 강화하고, 피해자 지원 및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예산도 확충하기로 했다.
정현백 여가부 장관은 “‘미투 운동’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장 오래된 적폐인 성별 권력구조와 성차별 문제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마침내 터져 나온 것으로, 이제는 미투 운동을 넘어 사회구조적 변화를 위한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할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이번 대책을 포함해 그동안 관계부처가 마련한 일련의 대책들을 범정부 협의체를 중심으로 종합화‧체계화해 이행점검하고 보완해 나감으로써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박상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