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란의 파독 광부·간호사 애환 이야기] <8>이단비 집사

입력 2018-03-02 14:11 수정 2018-03-03 09:30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림을 그리는 이단비 집사의 일상 모습.

그에게 ‘얼굴’은 낯선 시간의 빛깔이었다. 그리다 보면 늘 얼굴이었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애증의 흔적이었다. 외로움의 시작이었고, 마치 찰나가 영원처럼 누군가를 사랑했다.

아틀리에는 얼굴로 가득 차 있다. 텅 빈 도화지에 얼굴을 채워갈 때 괴로웠던 시간의 퇴적층이 허물어졌다. 인생을 굽이굽이 돌아 거울 앞에 선 누이처럼, 도화지 속 얼굴이 해사하게 웃었다. 이단비(68·본명 이명숙) 집사의 화실. 그는 얼굴화가다.

독일 시민학교(Volkshochschule) 미술반에서 실크를 배웠다. 배운 후 미술반에서 강사로 일했다. 그때서야 그의 천부적 열정과 끼가 세상 속으로 나왔다.

이단비 집사(오른쪽 두 번째)가 1971년 간호대 졸업식에서 부모님, 동생과 함께 기념촬영한 사진.

어릴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 때문에 등 떠밀려 선택한 간호학교였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다. 할머니와 살았던 그는 늘 미운오리 새끼였다. 할머니는 날마다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그런 날은 악몽을 꿨고 병적인 두려움에 휩싸였다.

“엄마 닮아 지지리도 못 생겼다”는 할머니의 핀잔 탓에 상처는 염증처럼 곪아갔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마음의 빗장을 닫았다. 자살하려고 청산가리를 가지고 다녔다. 때론 예쁜 사람을 보면, 관음증 환자처럼 집에 와서 몰래 얼굴을 그렸다.

스무 살에 남자를 만났다. 자존감의 부재는 넘지 못할 육체의 욕망을 낳았다. 1960년대 당시 처녀의 낙태는 우울한 미래의 복선이었다. 결국 비상구로 선택한 곳이 독일이었다.

72년 파독 간호사로 도착한 곳은 당시 서독의 수도 본이었다. 병원 수술실 근무는 힘들었다. 독일 동료들은 억세고 거칠었다. 두려움과 고독이 파고처럼 엄습했다. 문득 할머니가 굿을 했을 때, 그가 한두 번 도망가듯 뛰어갔던 교회가 떠올랐다. 독일교회의 문을 열자 편안함이 빛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잠깐의 휴식을 주는 소파일 뿐이었다.

3년 후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부었던 연금을 다 털어 부모님께 집을 사드렸다. 허전했다. 마음을 달랠 길 없어 그림을 그렸다. 2년 후 오래전 병원에서 알게 된 독일 남성의 초청으로 다시 본으로 왔다. 병원에 출근했고 초청해준 남성과 결혼했다.

독일인 남편은 장애인인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독일인 시어머니는 아시아에서 온 작은 여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또다시 자존감의 박탈이 왔다. 남편은 쾰른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만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그 시간마저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시어머니가 반신불구여서 근무 후에 돌봐드리고 살림을 도맡아 했지요. 그때 남편은 아이를 원하지 않았고…. 정말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어요.”

1984년 독일을 방문한 어머니, 딸과 함께한 이 집사(가운데).


이 집사는 위로받기 위해 매주 교회로 향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피폐해져 갔다. 수술실 근무라 당직 날이면 병원에서 자야 했다. 그때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이가 있었다. 가정이 있는 스위스인 당직 의사였다. 이 집사는 그 의사에게서 인생 처음으로 ‘당신, 참 예쁘다’는 말을 들었다. 마음과 몸이 송두리째 그에게 향했다.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하지만 임신 중일 때 그는 이미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간 뒤였다. 눈물 속에 딸을 낳았다.

“절망감이 들었어요. 아이를 낳았는데 남편은 자기 자식처럼 키우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제 마음엔 이미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었어요. 아이가 자라면 남편과 헤어지겠다고 다짐했어요.”

결국 2000년 딸이 대학을 다니던 해, 부부의 끈을 내려놓았다. 그때 이혼 소식을 들은 딸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삭발을 하며 분노했다.

“아이는 그때까지 남편을 친아버지라고 생각했어요. 아이가 배신감에 힘들어했어요. 전 그때 교회는 다녔지만 죄와 회개가 뭔지 잘 몰랐어요. 가면을 쓰고 살았던 셈이죠. 그저 육신이 흘러가는 대로 살았어요.”

이후 이 집사는 생의 길을 바꿨다. 당시 한국계 네덜란드인 남성 김라파엘씨를 알게 됐다. 그는 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을 했던 이였다. 나이 들면 조선족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을 비쳤다.

2005년 그를 따라 무작정 길을 떠났다. 지린성은 문맹인 조선족이 많았다. 이 집사는 교회에서 성경쓰기를 통해 조선족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뿌듯함이 몰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라파엘씨가 건강검진 중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결국 2010년 라파엘씨가 살았던 네덜란드로 함께 돌아왔고 그는 숨을 거뒀다. 이 집사는 처절하게 혼자가 됐다.

“그분을 화장하고 유골함을 찾아야 하는데 돈이 없었어요.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제야 십자가 앞에 울부짖었어요. 그때 베를린에서 함께 살자고 딸에게 연락이 왔지요.”

이단비 집사의 작품들.

딸은 여전히 상처 속에 있었다. 밤새 이야기했고 함께 울었다. 모녀는 각자의 삶에 얽힌 상처를 싸매주고 어루만졌다. 그 안에는 회복자이신 예수님의 마주잡은 손이 있었다.

‘내가 죄인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얼마나 회개의 눈물을 흘렸는지 몰라요. 주님은 저 같은 죄인을 버리시지 않고 사랑으로 기다려주셨어요.”

하나님은 그에게 세상의 잣대를 들이대거나 적대적인 입장이 아닌 날것 그대로 안아주셨다. 진정한 자존감의 회복이 왔다.
이 집사의 얼굴 그림은 깊은 향기가 있다.

불안하고 어두운 삶의 터널을 거친 후 진정한 위로와 회복이 얼굴 속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아틀리에 창밖으로 그의 이름처럼 봄의 단비가 내린다. 이제 봄날이다. <재독 칼럼니스트·kyou7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