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인들은 지하 공동묘지(카타콤베)에 숨어 지내며, 로마군에 발각되면 사자의 밥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았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보호해 주시며 부활시켜 영생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로마의 박해를 이겨냈다. 당시 카타콤베엔, 수많은 ‘선한 목자’ 벽화가 그려졌다. 아마도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선한 목자’라는 개념이 절실했을 것이다.
이후 복음서가 정립된 후 요한복음 10장 11절의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는 구절과 누가복음 15장 3~6절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가 더해져 주님은 선한 목자라는 도상이 완성됐다.
다른 화가들의 ‘선한 목자’ 그림은 인자한 모습의 예수님이 양을 어깨에 둘러멘 모습이다. 그런데 유독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그림이 주목 받는 이유는 목자의 남루한 의복과 몰골 때문이다. 오랜 시간 강을 건너고 숲을 헤치면서 도중에 늑대를 만나기도 했는지 옷은 다 해어지고 고생한 모습이다.
그런데 ‘선한 목자’의 선하다 함은 무엇인가. 남보다 동정심이 좀 더 있어서 양을 지키고 도와주면 선한 목자인가. 마가복음 10장 18절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신다. 여기서 선하다 함은 악함의 반대 개념이나 상대적인 선함이 아니다. 유일한 선함(The Good)은 하나님(God)이다. 하나님은 완벽한 절대선으로서 모든 피조물은 그 깊이와 끝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절대적인 선함에 기대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그 절대적인 선함 앞에서 어떤 경우에도 우리의 업적이나 선의를 자랑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느라 찢기고 죽으셨다. 그렇게 구원한 우리를 메고 기뻐하실 주님을 묵상하자.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
미술사에 크라나흐라는 이름은 두 번 나온다. 이들은 부자지간이고 둘 다 알브레히트 뒤러와 함께 독일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다. 그는 평생 독일 작센지방의 프리드리히 공작 궁정화가였다. 초기에는 가톨릭적인 종교화와 신화의 누드를 주로 그렸고 많은 왕족과 종교계 지도자들의 초상을 남겼다. 마르틴 루터와는 가족 간에 빈번하게 왕래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워, 후기에는 개신교적 종교화와 종교개혁 지도자들의 초상화도 많이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