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청업체 ‘노예’ 대우
본부 직원 출퇴근 지장 준다 비상계단 못 다니게 하고
식재료 혹시라도 부족할라 점심시간 한시간 늦추기도
▨ 극단적 선택까지
금융그룹 하청받은 中企 대표 폭언·부당 요구에 목숨 끊어
지난해 프리랜서 IT 직원도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에…
▨ 문제는
ICT업종 계약서 매뉴얼 전무 ‘갑-을-병-정’식 하청 구조
원청 업체에 호소도 어려워 실력있는 개발자들 해외로
지난 1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산업은행 IT본부의 소방안전 위험에 대한 감사를 요청하는 글이 올라왔다. 외주 직원들이 해당 본부가 있는 건물에선 비상계단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화재가 나면 창문으로 뛰어내리거나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밀양과 제천 화재로 대형 인명 피해가 난 터라 이 글은 끔찍하게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지난 26일 청원 마감된 이 글의 핵심은 소방 안전이 아니었다. 산업은행 본사 직원들의 출퇴근 편의를 위해 외주 직원은 비상계단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갑질’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정부가 전속거래 구속행위 금지 방침 등 하청 업체를 상대로 한 원청 업체들의 갑질 근절에 나서고 있지만 ICT(정보통신기술) 업종 하청 업체들의 문제에는 소홀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나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관련 부처들이 지난해부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앞다퉈 내놓으면서도 이들이 졸업 후 제대로 근무할 수 있는 여건 조성엔 소홀하다는 불평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소프트웨어(SW) 등 ICT 전문 인력을 육성하겠다고 하지만 고질적인 갑질 횡포 때문에 외국으로 떠나는 사람이 많다”면서 “ICT 전공자들은 졸업하면 하청업체 외주 직원이 될 것이란 인식이 크다”고 말했다.
피해 속출해도 쉬쉬
ICT 외주 업체를 상대로 한 갑질은 비단 산업은행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업계 종사자들은 자신을 전산망이 필요한 모든 기업과 기관의 갑질에 시달리는 ‘현대판 노예’라고 호소했다.
유통 대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고 근무한 A기업 관계자는 본사 직원들보다 출근은 30분 빠르고, 퇴근은 30분 늦다. 점심시간엔 구내식당에 본사 직원보다 한 시간 늦게 가야 한다. 이 대기업은 엘리베이터가 혼잡할 수 있고 식재료 부족이 발생할 수 있어서라고 한다. SW 개발자는 “ICT 외주 업무 환경의 문제는 한두 곳이 아니다”며 “창고나 주차장 등 지하에서 업무를 하는 곳도 많다”고 말했다.
쉴 자유도 없다. 연차는 고사하고 공휴일도, 주말도 없다. 공공기관에서 일한 B기업 관계자는 “지난해 역대 최장이었다는 10일간의 추석 때도 본사 직원이 우리한테 이틀만 쉬라고 요구했다”면서 “이번 설에는 당일 하루 쉬었다”고 말했다.
폭언도 수시로 발생한다. A기업 대표는 “과장급 원청업체 직원이 하청업체 사장이라며 막말을 하는 건 다반사”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했다. 최근 또 다른 금융그룹의 하청을 받은 중소기업 대표는 원청 업체의 부당한 요구와 폭언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금융그룹은 차세대 전산 시스템 도입에 나섰지만 한 차례 공개 시점을 연기했다. 지난해 말에는 또 다른 중견 금융기업에서 프리랜서로 근무하던 IT 직원이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와 개인사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나 ICT 업계에선 이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일감을 받아야 하는 하청업체들로선 피해사실을 공론화하면 소위 ‘찍히기 때문에’ 시장에서 매장당할 것을 우려한다. 잇따른 비극적 소식에도 업체 관계자들이 쉬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고용노동부나 공정거래위원회 쪽에 고발을 할 수 있어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공정위 관계자도 “처음엔 고소·고발을 하려다가 자신의 이름이 알려진다는 설명을 들으면 사업을 따낼 수 없다며 익명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경우가 많다”면서 “그렇게 되면 시간이 최소 6개월은 걸리기 때문에 이기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구조적 개선 없으면 4차 산업혁명도 없다
전문가들은 중소 ICT 업체를 대상으로 원청 업체들의 갑질 횡포를 막으려면 근본적으로 업무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고 지적한다. ICT 업종은 역사가 짧다보니 원청 업체의 무분별한 요구를 막기 위한 대응 방법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이를 원청업체들이 악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공정위 김남용 건설용역하도급과장은 “그나마 건설업체들은 오랜 세월 축적된 노하우를 발판으로 매뉴얼에 따라 계약서를 작성하고 대응 방법도 알고 있다”면서 “이에 비해 ICT 업종은 그런 매뉴얼조차 없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실제 업계 사례를 보면 피해 내용은 심각하다. 대표적인 게 작성한 계약서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우였다. 공공기관의 하청을 받아 시스템을 개발한 C기업 김모 대표는 “계약서에 ‘1’을 요구하면 나중에 1-1, 1-2를 요구한다”면서 “개발을 완료한 뒤에는 자신들의 운영 실수로 발생한 오류까지 고쳐 달라며 밤낮 없이 전화하고 이를 거부하면 내용증명을 보내 압박한다”고 말했다.
억지춘향식 요구를 하기도 한다. 대형 유통기업의 하청으로 시스템을 개발한 D기업 최모 대표는 “계약 당시 우리 회사 SW를 사용하기로 했는데 사업을 시작한 뒤 해외 대기업 제품을 사용하라고 요구했다”면서 “구매 비용도 우리 돈으로 내라고 했다”고 전했다.
문제는 원청업체의 막무가내 요구가 있어도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들은 법적·도의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강구하기 때문에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최 대표는 최근 공정위에 해당 기업을 고발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다.
기형적인 하청 구조도 바꿔야 한다. 단순한 ‘갑-을’ 구조에서 진화한 ‘갑-을-병-정’ 구조라는 것이다. 원청 업체들이 ICT 관련 자회사를 만들어 하청을 주면 자회사가 재하청 주고, 재하청 업체는 또 다시 중소 벤처 업체들을 끌어모아 작업을 한다. 이렇게 되니 ‘정’의 위치에서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이 ‘병’의 위치인 중소기업에 문제점을 호소해도 해결하기 어렵다. 갑인 원청업체는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선 철저히 빠져 있다.
이참에 노조 같은 강력한 연대를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오지만 소규모 기업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어 뜻을 모으기 쉽지 않다. 결국 실력 있는 개발자들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대우해 주는 외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
C기업 김 대표는 “창업할 때부터 같이 일했던 개발자가 2년 전 중국으로 갔다”면서 “떠나도 잡을 수 없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세종=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그래픽=이은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