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한달 만에… 경찰 수사대상 19명, 영장 검토 1건

입력 2018-02-26 14:37 수정 2018-02-26 21:03
성추행 의혹이 불거진 연출가 이윤택, 고은 시인, 배우 조민기(왼쪽부터)/국민일보 DB, 뉴시스

이철성 경찰청장은 26일 “현재 경찰 차원에서 미투 운동과 관련해 수사 중인 대상이 모두 19명”이라고 밝혔다. “정식 수사 중인 미투 사건은 3건이고 영장 신청을 검토 중인 사안도 1건 있다”고 덧붙였다.

이 청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공소시효 문제도 있고 친고죄 법령이 개정돼 실질적인 가벌성은 없더라도 추후에 그런 행동을 제어하는 효과 등을 고려해 여러 의견을 듣고 있다”며 “피해자 의사에 반해서는 할 수 없겠지만 진술을 들어보고 사법적인 조치를 할 수 있는 건 하도록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 ‘미투 유발자’ 안태근 전 검사장 소환

‘미투 운동’은 한 달 전 서지현 통영지청 검사가 과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그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전 검사장은 26일 검찰 성추행사건진상규명·피해회복조사단에 소환됐다. 서 검사가 검찰 내부통신망 이프로스에 폭로글을 올린 지 약 한 달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 전 검사장은 조사단 사무실이 있는 서울동부지검에 들어서며 “성실하게 조사헤 임하겠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안 전 검사장을 상대로 성추행과 직권남용 의혹을 모두 조사할 계획이다. 성추행 사건 이후 서 검사가 항의한 과정,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이던 최교일 현 자유한국당 의원이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는 의혹, 이후 2014~2015년 서 검사가 여주지청에서 근무하다 통영지청으로 인사발령이 난 배경 등을 살펴보며 안 전 검사장의 개입 여부를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조사단은 직권남용 혐의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안 전 검사장을 출국금지한 상태다. 친고죄가 있던 2010년 발생한 성추행 혐의는 고소 기간이 지나 법적 처벌이 어렵지만, 성추행 사건의 사실 여부는 직권남용 혐의 적용의 밑바탕이 된다. 성추행 사건이 불거진 뒤 서 검사가 항의한 과정이 안 전 검사장의 보복성 인사 조치의 배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사를 마친 뒤 안 전 검사장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여부도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안 전 검사장은 서 검사의 폭로 이후 계속 칩거해 왔다. 그는 폭로글이 올라온 직후 법조 출입기자단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오래 전 일이고 문상 전에 술을 마신 상태라 기억이 없다”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해명했다. 범행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었고 주취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함의가 담겼던 해명이었다. 또 서 검사에 대한 인사 불이익과 관련해선 “그 일이 검사 인사나 사무감사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

◇ ‘괴물’ 등장한 문학계… ‘리허설 사과’ 연극계

한국 여성의 ‘미투’는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 검사의 용기 있는 외침은 온라인에 머물던 ‘미투’ 운동을 오프라인으로 확산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피해자가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절대로 개혁이 스스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고 말하는 현직 여검사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민낯을 폭로하는 증거였다.

그로부터 한 달. ‘미투’는 문학계로, 연극계로, 영화계로, 대학가로 번졌다. 내로라할 거물들이 성추행·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됐다. 아니라고 발뺌할수록 피해 증언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너도나도 자신이 만난 ‘괴물’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최영미(57) 시인은 지난해 계간지 ‘황해문화’ 겨울호에 ‘괴물’이라는 시를 발표했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문단 내에 만연한 성폭력을 고발한 이 시가 다시 불붙은 ‘미투’ 운동과 함께 재조명됐다. 최 시인은 지난 6일 JTBC에 출연해 “피해자는 수십명”이라며 “권력을 쥔 문인의 성적 요구를 거절하면 복수를 당한다”고 쐐기를 박았다.

문학계 인사들은 노벨상 수상자로 매번 이름이 오르내린 고은(85) 시인을 ‘괴물’로 지목했다. 고 시인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경기도 수원시가 마련해준 수원 장안구 광교산 자락의 창작공간 ‘문화향수의 집’을 떠나기로 했다. 그가 남긴 말은 “더 이상 수원시에 누가 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수원시는 올해 고은 시인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추진할 예정이었던 문학 행사를 전면 재검토 하기로 했다. 교육부는 지난 21일 중·고교 검정 국어교과서에 고 시인의 작품이 수록됐는지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학계에 이어 연극계 폐단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지난 14일 극단 미인 김수희 대표는 ‘연극계 대부’ 연출가 이윤택(66)의 충격적인 이면을 폭로했다. 그는 이윤택이 평소 연희단거리패 여성 단원에게 성기 마사지 등 성적인 ‘안마’ 요구했고, 자신 역시 10여년 같은 방법으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의 글은 ‘이윤택 성추문’의 시작에 불과했다. 성추행을 넘어 성폭력 피해자들이 줄줄이 등장했고 임신과 낙태를 반복한 사례까지 터져나왔다.

이윤택은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을 비롯해 모든 자리에서 물러나고 예정된 공연을 취소했다. 그래도 폭로가 계속되자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18년 가까이 관습적으로 일어난 나쁜 행태”라고 해명했다. 이윤택은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면서도 성폭행 의혹은 부인했다. 이후 극단 소속 배우가 “이윤택이 피해자들을 비난하고 기자회견 역시 리허설을 했다”고 추가 폭로하면서 비판은 더욱 커졌다.

이윤택과 함께 인간문화재인 하용부(63) 밀양연극촌 촌장 역시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됐다. 최소 3명이 성폭행 피해를 주장했지만 하 촌장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26일에서야 연합뉴스에 “모든 걸 인정하고 다 내려놓겠다”며 인간문화재를 반납하겠다고 밝혔다.

원로 연출가 오태석(78) 역시 한 여성 연출가의 폭로로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서울예술대학교 총학생회는 연극과 교수인 오태석의 퇴출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오태석이 대표를 맡고 있는 극단 목화 관계자는 “오 교수의 개인적 일이라 극단에서 의견을 낼 계획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 ‘믿고 보는 배우’에서 성추행 가해자로

조민기(53)는 연극학과 교수로 있던 청주대에서 학생들을 성추행한 의혹을 받고 있다. 지난 20일부터 이어진 청주대 졸업생들의 폭로에는 대부분 비슷한 피해 내용이 담겨 있다. 조민기가 오피스텔로 여학생들을 불러 상습적으로 성추행했고, 조민기의 업계 영향력이 막강해 학생들은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청주대가 지난해 11월 성추행 피해 신고를 접수해 조민기를 강의에서 배제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대학 측은 조민기를 28일자로 면직 처분하기로 했다. 경찰도 그의 성추행 혐의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이다. 조민기는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했지만 연일 구체적인 폭로가 이어지면서 지난 21일 출연 예정이었던 드라마에서 하차했다.

조민기에 이어 조재현(52)도 ‘유명 배우이자 연극제작자 J씨’라는 이름으로 성추행 파문의 주인공이 됐다. 여성 스태프를 혼자 불러내 강제로 입을 맞추고 가슴 등을 만졌다는 폭로였다. 조재현은 출연 중이던 드라마 하차를 결정하고 24일 입장문을 냈다. 그는 “지금부터 피해자분들께 속죄하는 마음으로 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보내겠다”며 “정말로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했다.

‘천만 배우’ 오달수(50)의 성추행 의혹은 기사 댓글로 시작됐다. 한 네티즌이 “90년대 어린 여자 후배들을 은밀히 상습적으로 추행했던 연극배우가 코믹연기하는 유명한 조연 영화배우”라고 고발했고, 이후 오달수의 이름이 거론됐다.

오달수 측은 진위를 확인해달라는 요구에 묵묵부답하다 26일 뒤늦게 입장을 밝혔다. 오달수는 “저를 둘러싸고 제기된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라며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 배병우(68), 배우 겸 교수인 한명구(58) 등이 성추행을 인정했다. 뮤지컬 ‘명성황후’ ‘영웅’ 등을 연출한 ‘뮤지컬 대부' 윤호진(70) 에이콤 대표는 성추행 논란이 불거지자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배우 최일화(59)는 과거 성추행 논란에 연루됐던 사실을 스스로 털어놨다. ‘폭로’가 아닌 ‘고백’으로 추문이 드러난 첫 사례가 됐다. 그는 사죄의 뜻을 밝히며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직 등을 내려놓고 자숙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 대학교수, 성직자까지… 계속 확산되는 ‘미투’

천주교 사제의 성폭행 시도 사실도 폭로됐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공식 사과문을 발표해 7년 전 한모 신부가 남수단에서 봉사활동 중 여성 신도를 성폭행하려 했던 사실을 인정했다. “깊이 참회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한다”고 밝혔다.

한 신부는 소속 교구에서 정직 처분이 내려진 상태다. 그가 주임신부를 맡고 있던 경기도 수원의 성당은 25일 ‘주일’임에도 출입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2월 25일~3월 2일 본당 사정으로 미사는 없습니다. 인근 성당을 이용해주십시오’라는 안내문이 붙은 채였다. 수원교구는 이용훈 주교 명의로 ‘수원교구민에게 보내는 교구장 특별 사목 서한’을 발표해 사과하며 사제를 대상으로 일종의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한양대에선 지도교수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대학원생의 폭로가 나왔다. 대학 측은 이 학생을 면담하고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한양대 인권센터는 그에게서 성희롱 피해를 입증할 자료도 제출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곧 해당 교수를 불러 입장을 들은 뒤 심의위원회나 징계위원회 개최를 검토할 예정이다.

이 대학원생은 지난달 30일 소셜미디어에 장문의 글을 올려 지도교수와 강사에게 부적절한 신체접촉과 함께 “단둘이 만나고 싶다” “열렬한 관계가 되자” 등 불쾌한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수님께 사과와 지도교수 교체 등을 요구했으나 소름 끼치는 침묵과 주변의 비겁한 대응을 겪었다”며 ‘미투 운동’ 동참 배경을 설명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