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막을 내린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데는 자원봉사자들의 공이 컸다. 그러나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에서 겪은 고충은 적지 않았다. 대회 초반 좋지 않은 처우로 인해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대한체육회 등의 ‘갑질’도 견뎌야 했다. 다행이었던 건 그들의 애환과 고민거리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익명의 공간이 있었다는 것. 자원봉사자들이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을 익명으로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대신 전해드립니다(평대전)’를 만든 자원봉사자 전병준(28)씨를 지난 22일 만났다.
“그동안 국제대회는 조직위에서 아래로 하달하는 식이었잖아요.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춰져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훈훈한 이야기가 퍼졌으면….
페이지를 만든 이유를 묻자 병준씨는 2002년 월드컵 당시를 떠올렸다.
“2002년도 월드컵 때 시민들이 다 같이 모여서 응원한 뒤 같이 청소하면서 우리나라 국민 인식이 높아졌다는 뉴스 많이 나왔었잖아요. 그런 훈훈한 일화 같은 것들이 많이 올라와서 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페이지가 있으면 좋겠다싶어서 바로 만들었어요.”
자원봉사자들이 ‘평대전’에 메시지를 보내면 병준씨가 익명으로 대신 게시하는 식이다. 하루에 100건이 넘는 메시지가 온다고 했다.
“저는 인천공항에 입국하는 선수들이나 IOC 관계자, 외신기자들의 AD카드 등록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인천공항에 있다 보니까 약간 유배지 같았는데 평대전을 운영하면서 오히려 평창에 계신 분들보다 더 그쪽 소식을 알게 됐죠. 하도 메시지가 많이 들어오다 보니까 한 구독자로부터 ‘타임라인에 공해가 되는 경우가 있으니 좀 걸러달라’는 요청을 받아 거를 건 거르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의 민주적 공론장
평대전을 통해 이슈가 된 것들도 많다. 특히 이기흥 대한체육회장의 ‘갑질’ 논란은 평대전을 통해 처음 알려진 뒤 이 회장이 공식적으로 사과까지 했다.
“대한체육회 회장이 막말을 하는 등 자원봉사자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조직위 입장에선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겠죠. 그래서 언론 접촉을 막았을 수도 있는데 자원봉사자들이 익명으로 올릴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수면으로 드러났고 (이 회장이) 사과를 하는 상황까지 왔었죠.”
셔틀버스가 제시간에 오지 않아 추위 속에 떨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이에 대한 고충이 평대전에 올라오자 한 자원봉사자는 셔틀 노선도를 직접 제작해 평대전에 공유하기도 했다.
“3~4시간씩 기다리면서 버스를 타는 장면을 현장에서 동영상으로 찍어서 보낸 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한 자원봉사자 분이 스스로 이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 노선도를 직접 다 만드셨어요. 조직위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인거 같은데 노선표를 쫙 만들어서 평대전에 올려줬거든요. 분실물 신고도 많이 들어오고, 지금 몇 동 몇 호에 새벽 1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 새벽 일찍 근무 나가야하니까 조용히 좀 해 달라 이런 것들도 올라오고. 알펜시아 스키점프대 앞에 몇 시에 근무하셨던 빨간 옷 입었던 근무자 마음에 든다 이런 메시지도 있어요.(웃음)”
처음 자원봉사자로 합격을 했을 때 자부심이 컸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야, 너 되게 재밌게 살고 있다’거나 ‘의미 있는 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언론에선 자원봉사자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지인들은 오히려 ‘너 거기 가서 개고생하고 오는 거 아니냐’고 했다. 병준씨는 “그게 아쉬웠는데 다른 자원봉사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다들 자부심으로 시작했는데 자꾸 부당한 처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게 아쉬웠나 봐요. 초반에는 ‘우리 밥 이렇게 안 나온다’고 올리더니 요즘 사진첩에 올라온 식사 사진들 보면 되게 풍성하게 나온 사진들만 많이 올라오고 있어요.”
힘든 환경에도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는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산골짜기에 숙소가 배정된 자원봉사자들은 시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생필품을 구입하기도 힘든데 이들의 ‘집념의 치킨 배달기’도 그 중 하나다.
“개막식 때 치킨을 먹으면서 보고 싶은데 배달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때 한 자원봉사자가 20마리 이상 주문하면 배달시켜줄 수 있다는 치킨집을 섭외한 뒤 숙소 단톡방에서 방마다 몇 마리 필요한지 엑셀로 쫙 정리해서 되게 조직적으로 치킨을 먹었다는 사연도 있었어요.”
처우문제 등이 사회적인 관심을 끌게 되면서 실제로 개선되는 것도 많았다.
“부당한 문제가 이슈화가 되고 여론이 형성 되면서 KBS 뉴스 헤드라인이나 JTBC 뉴스룸에 나오니까 신기하더라고요. 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약간 걱정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조직위에선 이게 썩 탐탁치만은 않은 채널일수도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고. 여기에서 이슈가 되는 부분에 대해 개선하려고 많이 노력해주셔서 되게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죠.”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한 거니까
자원봉사자들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여기서 나온 이야기를 통해 실제로 잘못된 걸 개선해 나가는 과정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었지만 병준씨는 “그냥 제가 좋아서 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올림픽 기간 함께 고생한 자원봉사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올림픽도 이제 다 끝났고, 패럴림픽도 끝나면 페이지는 이제 운영이 안 되겠죠. 조용히 사라지겠지만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한 거니까…. 평대전에 들어오는 제보들을 보면서 자원봉사자들이 진짜 고생 많이 한다는 게 느껴졌던 거 같아요. 날씨도 춥고 서로 힘든 상황 속에서 듣고 싶지 않은 소리도 들으면서 우는 분들도 많이 계시다고 하더라고요. 막말 듣고 짜증내는 소리 다 받아야 되니까. 어떻게 보면 관중들 앞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맨 앞에서 총알받이 역할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자원봉사 열심히 하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대회도 좋은 이미지로 성공적으로 잘 마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춰져 있었을 우리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공간.
올림픽은 끝났지만 여기서 나눈 평창의 추억은 계속 될 겁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