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피드스케이팅 간판 이승훈(30)이 동계올림픽 남자 매스스타트 초대 챔피언 자리에 오르며 아시아 선수 가운데 올림픽 최다관왕의 아성을 지켰다.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로 순도도 높다.
매스스타트 세계 최강자다운 레이스 운영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여기에는 함께 뛴 정재원(17)의 지분이 크다. 정재원은 이날 8위에 그쳤다. 그러나 그에게 메달리스트 못지않은 관심이 조명되는 것은 그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100% 이상 수행해냈기 때문이다.
매스스타트에서의 페이스메이커는 마라톤의 페이스메이커와 비슷한듯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마라톤 페이스메이커는 자신의 기량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며 일정한 지점까지 주전 선수를 견인한다. 선두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마라톤에서 주전 선수가 뒤처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이다.
그러나 매스스타트 페이스메이커는 메달권 선수가 힘을 모을 수 있도록 맨 앞에서 속도를 조절한다. 무조건 빠른 속도로 스케이팅을 했다가는 체력 소비로 우승과 멀어진다. 그렇다고 힘을 아끼기만 하면 선두 그룹과의 격차를 회복할 수 없다. 마라톤보다 조금 더 섬세하며 빠른 상황 판단이 필요하다. 이같은 차이는 매스스타트의 특이한 경기방식으로 인해 나타난다.
기록으로 승부하는 마라톤과는 달리 매스스타트는 순위로 승패를 가른다. 총 16바퀴(6400m)를 달리는 동안 4·8·12바퀴를 돌 때 1·2·3위에게 각각 5·3·1점을 부여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바퀴에서 선두로 달릴 필요는 없다. 마지막 16바퀴에 가장 많은 점수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1·2·3위에게 60·40·20점이 부여되고 총점을 합산해 순위를 결정한다. 즉 경기 내내 1위로 달린다고 해도 마지막 바퀴에서 3위 안에 들지 못하면 메달을 목에 걸 수 없다.
선수마다 경기 운영 작전이 다르기 때문에 마지막을 노리는 선수, 경기 내내 1위를 유지하는 선수 등 다양하다. 그러나 매스스타트의 키포인트가 되는 것은 단연 마지막 바퀴다. 때문에 경기 내내 효율적인 레이스로 체력을 비축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 페이스메이커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정재원은 이승훈의 막판스퍼트를 위해 이같은 역할을 수행했다.
이날 경기에서는 두 명의 선수가 시작부터 앞으로 치고 나가 반 바퀴 이상의 격차를 벌렸고 1, 2위 그룹으로 나눠졌다. 이때 정재원은 경기 중반을 넘어설 때까지 2위 그룹의 선두로 달렸다. 장기 레이스에다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정재원을 앞지르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정재원은 홀로 바람을 맞으며 1위 그룹과의 거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리고 4바퀴를 남긴 시점에서 점점 속도를 올려 힘이 빠진 선두 그룹과의 격차를 좁혔다.
그러는 동안 이승훈은 뒤에서 체력을 비축했다. 무서운 막판 스퍼트를 펼칠 수 있는 힘을 만든 것이다. 이승훈은 2바퀴를 남긴 상황에서 선두권으로 치고 올라왔고 정재원은 그제서야 허리를 폈다. 페이스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마쳤기 때문이다.
정재원은 월드컵 대회 때의 기억을 살려 경기를 리드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월드컵 때 선두권과 격차를 좁히려는 선수가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예상했고 내가 그 역할을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승훈이 형이 치고 나가는 것까지 보고 ‘내 역할은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다음부터는 승훈이 형이 몇 등으로 들어가는지만 보고 있었다”고 했다. 정재원은 처음부터 자신이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매스스타트는 개인 종목이다. 그러나 가슴에 태극마크를 단 두 사람은 한 팀으로 움직였다. 이승훈은 골인 후 정재원의 손을 번쩍 들어 영광을 돌렸고, 정재원은 인터뷰 내내 ‘우리 팀’이라는 말을 연속하며 기쁨을 표현했다. 환상적인 호흡으로 함께 만들어낸 금메달은 평창에서 수확한 한국의 5번째 금메달이자, 15번째 메달이 됐다.
문지연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