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핏 회장의 ‘우울한’ 편지… “감세정책에 32조 더 벌었다”

입력 2018-02-25 08:56 수정 2018-02-25 13:11

미국 투자회사 버크셔해서웨이의 워런 버핏 회장이 최근 투자자들에게 지난해 실적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냈다. 해마다 이맘때면 발송되는 그의 편지에는 “2017년 수익이 7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글에 묻어 있는 뉘앙스는 ‘환호’보다 ‘우울’에 가까웠다. 버핏 회장은 “작년 수익의 절반 가까운 32조원(290억 달러)은 트럼프 정부의 감세정책이 가져다준 것”이라고 밝혔다.

버크셔해서웨이는 지난 24일(현지시간) 지난해 4분기와 연간 실적을 결산해 보고서를 공개했다. 버핏 회장은 투자자들에게 이 보고서와 함께 보낸 편지에서 “지난해 버크셔해서웨이가 거둔 막대한 수익 중 약 절반은 우리가 성취한 결과물이 아니었다”고 적었다. 그는 “38조원만 우리 투자 활동의 결실이었고 나머지 32조원은 미국 정부와 의회가 세금구조를 바꾸면서 우리에게 가져다준 돈”이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법인세를 35%에서 21%로 낮추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고 공화당은 이를 통과시켰다. 트럼프 정부는 법인세의 대폭 인하를 비롯한 파격적 감세정책을 지난해 최대 실적 중 하나로 꼽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대폭의 감세”라고 선전해 왔고, 대표적인 ‘슈퍼리치 증세론자’인 버핏 회장은 이 정책에 반대했다.

경제전문가들은 미국 감세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슈퍼리치와 초거대 기업들이라고 분석했다. 영국 금융회사 바클레이스는 감세 혜택이 많이 돌아갈 대상 중 하나라 버크셔해서웨이를 꼽으며 “감세 초기에 막대한 혜택을 입을 뿐 아니라 연간 12%씩 지속적으로 수익 증대 효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번 감세법안은 2025년까지 효력을 갖는다.

버핏의 편지는 금융권의 이런 ‘예상’이, 그의 입장에선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는 기존의 세율도 ‘부자에게 너무 유리한’ 것이라고 비판해 왔다. 2011년 8월 버핏 회장은 뉴욕타임스에 기고문을 보내 이런 생각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초고소득자를 가리켜 ‘메가리치(mega-rich)’란 표현을 썼는데, 뉴욕타임스는 ‘슈퍼리치(super-rich)’로 제목을 달았다. ‘슈퍼리치 애지중지, 이제 그만’이란 타이틀의 기고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지도자들은 희생 분담을 요구해 왔다. 그러면서 나를 빼먹었다. 나의 메가리치 친구들은 어떤지 봤더니 그들도 희생을 요구받지 않았다. 빈곤층과 중산층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나가고, 대다수 미국인이 수입과 지출을 맞추려 분투하는 동안 우리 메가리치는 특별한 세금혜택을 누렸다. 정부는 우리가 멸종위기종이라도 되는 양 보호하려 안간힘을 쓴다.”

당시 그는 2010년 연방정부에 냈던 세금을 공개했다. 693만 달러. 엄청 많아 보이지만 자신이 벌어들인 과세대상 소득의 17.4%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그의 사무실 직원 20명에게 적용된 세율은 평균 36%였다. 이렇게 된 이유를 버핏은 2000년 이후 ‘돈이 돈을 버는’ 자본소득에 너무 관대해진 세금 구조에서 찾았다.

그는 “만약 내가 워싱턴에 있다면 자본이득과 배당금을 포함해 100만 달러 이상 고소득자의 세율을 즉각 올릴 것이다. 1000만 달러가 넘는 소득에는 거기서 추가로 더 올리자고 제안하겠다. 나와 억만장자 친구들은 그동안 충분히 보살핌을 받았다”며 글을 맺었다. 요약하면 “나는 세금을 더 내야 한다”는 말이었다.

버핏이 이런 글을 쓴 것은 양극화와 불평등이 최대 수혜자인 자신이 보기에도 너무 심각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가 꺼낸 증세론의 당위성을 입증하듯 그 다음 달 뉴욕에서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벌어져 ‘1%대 99%’란 구호가 등장했다.

“지난해 70조원이나 벌었다”고 알리는 버핏 회장의 편지에서 기쁜 기색이 읽히지 않는 것은 그가 여전히 이런 생각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핏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돈이 많은 부자다. 그러면서 정부를 향해 “나에게 세금을 더 물리라”고 외쳐 왔다. 그런 이에게 트럼프 정부는 거꾸로 막대한 감세 혜택을 안져줬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