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한 번 내겠다”더니… 정말 ‘일 낸’ 차민규

입력 2018-02-20 02:10
차민규가 19일 강원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경기장에서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에서 빙판 위를 역주하고 있다. 강릉=김지훈 기자

쇼트트랙에서 스피드 전향 ‘신의 한수’

소치올림픽 선발전 앞두고
오른쪽 발목 인대 크게 다쳐
힘든 재활 터널 거치고
단거리서 두각 나타내기 시작

“순위권 안에 든 게
말할 수 없이 가슴 벅차”

차민규는 은메달이 결정되자 “좋은 기록이라 금메달까지도 바라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아쉽게 0.01초 차이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에는 “순위권 안에 든 게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벅차다”던 그였지만, 승부사 특유의 아쉬움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일을 한 번 내겠다”며 칼을 갈았던 평창 동계올림픽 무대였다. 쇼트트랙 선수였던 차민규는 한국체대 재학 시절인 2012년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환했다. 몸싸움이 싫었다는 것이 그가 직접 말한 전환의 이유다.

하지만 차민규는 종목 전환 직후 소치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둔 시기 오른쪽 발목 인대를 크게 다쳤다. 병원에서 “부상이 완치되더라도 예전 기능을 회복하기는 어렵다”는 소견까지 들었다. 운동선수에게는 사형 선고와도 같은 판정이었지만, “태극마크는 한 번 따보자”는 각오로 차민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재활 과정을 잘 아는 제갈성렬 의정부시청 빙상단 감독은 “지옥 같은 나날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재활의 터널을 빠져나오도록 도운 것은 차민규 특유의 차분한 성격이었다. 제갈 감독은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그림자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성격”이라고 차민규를 설명했다. 제갈 감독은 태릉선수촌에서 차민규를 스쳐 지나갈 때면 평창올림픽 무대를 바라보라는 의미로 “민규야, 포기하지 마라”고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차민규는 조용히 “예 알겠습니다”라고만 대답했다고 한다.

부상에서 회복한 차민규의 상승세는 무서웠다. 2016년 국제빙상연맹(ISU) 월드컵 2차대회 500m에서 동메달을 따더니 지난해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에서도 500m 동메달을 따냈다. 지난해 ISU 월드컵 3차대회에서는 1위와 0.001초 차이의 은메달이었다. 모태범과 이강석이 이끈다던 단거리에서 차민규의 이름이 들리기 시작했다.

19일 강릉 오벌에서 차민규는 첫 100m 구간을 9초63으로 돌파했다. 앞서 달린 선수들에 비해 그리 빠르지 않은 기록이었지만, 차민규는 원래 막판에 속도를 올리는 스타일이었다. 제갈 감독은 오히려 “차민규의 평소 기록에 비춰 보면 초반은 빠른 편이었다”고 했다.

마지막 코너를 돌아나올 때 차민규의 몸은 원심력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쇼트트랙 선수 출신으로서 몸에 익은, 섬세한 곡선 주행 기술의 승리였다. 제갈 감독은 “체중의 2∼3배가 느껴지는 구간임에도 아주 경쾌하면서도 아름답게 빠져 나오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이경원 기자, 강릉=박구인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