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9일부터 2박3일간 평창올림픽 북한 대표단의 일원으로 남한에 머물 김여정의 숙소를 평창이나 강릉이 아닌 서울에 마련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접견 장소도 청와대가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이자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인 김여정은 북한의 ‘김씨 패밀리’ 중 처음 남한 땅을 밟게 된다.
정부는 8일 북한 대표단의 숙소와 문재인 대통령 접견 장소 등을 놓고 북한과 막바지 협의에 돌입했다.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김영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 등 대표단 면면을 감안할 때 접견 장소는 청와대가 유력하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접견 장소로 강원도 평창과 강릉, 서울 등을 다 고려하고 있다”며 “일단은 청와대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했다.
북한 대표단의 숙소 역시 서울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경호와 안전 문제를 감안할 때 서울만큼 경호 인프라가 잘 갖춰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대표단은 방한 기간 서울~평창을 오가며 주요 행사에 참석하게 될 전망이다.
◇ 김정은의 ‘풀베팅’
김여정은 9일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직접 참석한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 함께 10일쯤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김 위원장의 친서 또는 그에 준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및 북·미 관계를 일거에 전환시키려는 김정은 위원장의 ‘풀베팅’이 본격화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 위원장의 메시지에 따라 한반도 정세에 상당한 변화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정은 체제의 핵심 실세로 급부상한 김여정 제1부부장이 고위급 대표단에 포함된 것은 상당한 파격이다. 그는 지난 5일 평양역에서 박광호 당 선전선동부장과 함께 삼지연관현악단을 배웅했다. 평창올림픽과 관련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최고 수뇌부인 김씨 일가를 남측에 보낸 전례가 없었다.
청와대 관계자는 “북한 체제 특성상 김 제1부부장은 김 위원장의 가족인데다 가장 중요한 조직 중 하나인 선전선동부 소속”이라며 “상당한 역량과 재량권을 갖고 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혼자 올 때 보다는 훨씬 더 비중있은 역할을 가지고 오고, 무게감 있는 이야기가 오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다른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김 제1부부장의 방한은 그만큼 북쪽이 성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며 “김 위원장의 친서를 가져오고, 기대 이상의 대화를 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 최룡해 능가하는 ‘메신저’
김여정 제1부부장이 가져올 메시지를 통해 김정은 위원장이 제3차 남북정상회담을 전격 제안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미 신년사를 통해 남북 관계의 개선을 천명했고, 평창 동계올림픽에 자신의 동생을 직접 보내는 이른바 ‘통 큰 결단’을 한 만큼 연내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문 대통령에게 제안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김 위원장이 김 제1부부장에게 대략적인 지침만 주고 나머지는 재량에 맡기는 등 사실상 전권을 부여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김 제1부부장은 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고위급 대표단장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조차 하기 힘든 언급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북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김 위원장에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보고가 가능하다. 북한 최고 권력기구인 조직지도부를 장악한 최룡해 노동당 부위원장조차 이런 수준의 권한을 받고 내려오기는 어렵다. 그만큼 김 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 제1부부장은 명목상으로는 당 정치국 후보위원 겸 당내 전문부서 고위 간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백두혈통’인 김씨 일가라는 배경 덕에 그 존재감은 권부 최고 엘리트로 꼽히는 당 정치국 상무위원보다 큰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북측 통지문에서 김 제1부부장은 자신보다 당내 직급이 높은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장보다 먼저 호명됐다.
김 제1부부장은 북한 매체에 등장할 때 경직된 자세로 있는 다른 고위 간부와 달리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여러 차례 노출했다. 숙청 공포에 시달리는 엘리트들과 달리 김 제1부부장은 김 위원장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열수 성신여대 국제정치학 교수는 “김 제1부부장은 김 위원장의 복심”이라며 “김 위원장이 내려올 수 없으니 복심을 보냈다고 보면 된다”며 “북한이 평창올림픽에 김 제1부부장을 보냄으로써 자신들의 전략 변화를 내보이는 것 아닌가 한다”고 말했다.
◇ 김여정은 누구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은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유일한 동생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재일교포 출신 무용수였던 고용희(2004년 사망)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용희 소생 중에는 유일한 여성이다. 1987년생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후반 오빠인 김 위원장과 함께 스위스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위원장이 2012년 아버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어 북한 최고지도자에 오르면서 김 제1부부장도 권력 전면에 등장했다.
2014년 제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김 위원장과 함께 투표소를 찾으며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북한 매체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호명되며 김 위원장의 현지지도를 수행하는 등 지근거리에서 보좌해왔다.
2016년 5월 열린 7차 노동당 대회 때 당 중앙위원에 이름을 올렸다. 이어 1년5개월 만인 지난해 10월 당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진입했다. 지난해 12월 당 세포위원장 대회에서는 주석단 맨 앞줄에 앉은 모습이 포착돼 추가 신분 상승이 예견됐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고위급 대표단 명단에서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으로 호명됨에 따라 부부장에서 제1부부장으로 승진한 사실이 최종 확인됐다.
그는 현재 오빠 김 위원장과 함께 미국 재무부의 대북 인권제재 명단에 올라 있다. 미 재무부 제재 대상자는 미국 입국 금지와 미국 내 자산 동결,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 중단 등 조치가 취해진다. 다만 미국의 독자 제재여서 이번 방남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