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또렷… 성폭행 피해자 13년 전 ‘그날의 기억’ 신뢰한 법원

입력 2018-02-08 09:52
뉴시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픔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가슴에 묻어뒀던 13년 전 성폭행 피해 사실을 힘겹게 꺼낸 여성과 이를 부인하는 가해 남성의 법정 공방에서 재판부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의 판결을 내렸다.

부산고법 창원재판부 형사1부(부장판사 권순형)는 7일 10대 여성을 성폭행하고 강제 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A(64)씨의 항소심에서 징역 8년의 원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재판부는 1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제기한 A씨의 항소를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 피해 여성 B(24)씨의 13년 전 그 날의 ‘기억’을 신뢰한 것이다.

B씨의 아픈 기억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의 어머니와 얼굴을 알고 지내던 버스 운전사 A씨에게 성폭행과 강제추행을 당했다. 당시 10살이었다. 어머니는 지적장애가 있었고 아버지 역시 교통사고로 뇌를 다쳐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B씨는 이러한 가정환경 때문에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아픈 기억을 끝내 삼킬 수밖에 없었고, 이후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그렇게 13년의 세월이 흐른 뒤 B씨에게 평생의 괴로움을 안긴 가해 남성을 단죄할 기회가 우연찮게 찾아왔다. 2016년 3월 시골 버스터미널에 갔다가 A씨와 마주쳤다. B씨는 13년 전 악몽 같은 순간을 떠올렸고 오래 전 자신을 추행한 얼굴을 기억해냈다.

B씨는 두 달 후인 그해 5월 A씨를 고소했다. A씨는 1심 재판 과정에서 B씨를 성폭행하거나 강제추행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B씨의 진술이 일관되며 진술 자체가 구체적이고 세부적”이라는 이유로 B씨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의 설명대로 당시 어린 소녀였던 B씨의 기억은 너무나도 또렷했다.

B씨는 당시 A씨가 근무하던 버스회사 이름, 버스 노선 등을 정확히 끄집어냈다. 성폭행당했던 장소 역시 상세하게 진술했다. 재판부가 B씨의 아픈 기억으로 인한 진술을 인정하게 되면서, B씨는 13년 전 새겨진 가슴의 멍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게 됐다.

문지연 객원기자